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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2015

수수께끼 같은 선물

이번에 시집간 딸아이가 언제 슬그머니 갖다놨는지 집 한구석에 포장한 선물이 있었고 엄마아빠이름을 포장지에 적어 놓았다.



포장을 열어보니 자신의 어린시절 사진이 양쪽으로 있고 가운데는 빈 칸이다. 왼쪽엔 엄마와 자신이, 오른쪽엔 아빠와 자신이 찍혀있는. 무슨 수수께끼처럼 설명도 없고 또 우리도 특별히 물어보지 않았다.

제 어미가 며칠을 끙끙 거린 후, 가운데 들어갈 사진을 찾아 액자속에 넣더니 나에게 벽에 좀 걸어달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정답이다. 말 한마디 안 나눠도 통하는그 어미에 그 딸. 샘난다 정말.

6/30/2015

Love Letters

사무실로 쓰는 위층의 방을 정리하다가 오랜세월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 30여년 먼지가 뽀얗게 쌓인 투박한 가죽가방.

열어보니 신혼초 우리내외가 생이별을 하고 주고 받던 편지 수백통이 모두 그안에 들어있었다. 4학년 첫학기를 마친 상태에서 결혼해 혼자 미국으로 유학와 지내던 24살의 나, 그리고 결혼 후 우리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들어와 혼자 시집생활을 하며 학교를 다니던 21살의 아내가 1년여에 걸쳐 서로를 그리워하며 주고 받던 편지들을 각자가 소중히 가지고 있던 것. 

아내가 졸업후 전공을 바꿔 미국유학을 오게 되면서 상봉해 서로의 편지들을 모두 모아 이 가방에 넣어둔 것이었다. 오랜 세월 처박아두고 잊고 있었다는 건 다시 서로를 옆에 두고 볼 수 있게된 지라 그 편지들이 더 이상 소중하게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리라. 떨어져 있을 땐 행여 서로를 잊어버리지 않을까 상대가 보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애틋한 마음 뿐이었는데.

다음 주 가족들과 떠나게 되는 여행에 가지고 가서 아내와 같이 저녁노을 지는 바닷가에 나가 앉아 하나씩 꺼내 읽어봤으면 싶다. 30년만에 햇빛을 보게되는 그 녀석들이 과연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줄까...

There's been many complaints from my children about my blog postings because my children are able to read Korean letters but still not at the level of understanding what it means. So this translation is for them(as well as nieces and nephews who visit here every once in a while) so they have a chance of getting to know what my wife and I went through while we were young. Though, the following is not exact translation but should be close. Well, it's just not my nature pulling my hair out trying on a word-to-word translation!

Few days ago, while I was cleaning the room upstairs that I use for reading and writing, I found a dusty, old brown leather bag sitting on very top of the bookshelf. What's in there was quite a big surprise for me. They are the love letters my wife and I sent to each other back and forth for a year when we were young and separated.

Spending only 2 short months after we got married at the age of 24 and 21, I had to leave her for my study in the States and my wife moved in to my parent's house by herself and continued her study. We must have written to each other almost every 2-3 days, I believe, all the way through until we met again.

Upon her graduation, she came over to me as a foreign students with a different major. I still vividly remember the moment that we saw each other again. We were in each other's arms so tight for few minutes without saying a word. Oh, we rather did not want to waste even a half second trying to say things!

Then, we gathered all the letters we had kept while we had been separated, put them in this brown leather bag, and shoved it away thinking we didn't need them anymore because we had each other again to ourselves! Before we met in the States, these letters were so precious for both of us and enabled us to connect to each other's heart and kept us alive. I remember reading her letter as soon as it arrived in my mailbox, reading it again after the dinner, before going to the bed, and when I woke up, just over and over again. I even hated the national holidays so much because the postal service stopped running!

I am thinking about taking these letters to our family trip to the Outer Banks next week and reading them one by one with her sitting down on a beach under the sunset. These letters may tell us a lot of stories that we have forgotten as we open them...



5/05/2015

Proposal

큰 딸아이가 이 사진을 문자로 보내왔다. 방금 그 친구로 부터 청혼을 받았노라고.

오늘이 교제시작 2주년이고, 저녁을 먹자고 딸을 데리고 간 곳이 교제 시작하는 날 갔던 식당이었다고,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결혼해 줄 수 있겠냐고 물으며 반지를 내놓았다는 떨림과 흥분이 채 가지시 않은 딸아이의 목소리.

그래 평생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결혼식을 잘 준비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길 바란다.

엄마아빠도 너무 행복하고 기쁘구나. 사랑한다, 딸아.

4/30/2015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

나를 좀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하는 전화 저쪽의 목소리에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해 보니... 여자친구의 아버지에게 전화하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건데.

그리곤 오늘 밤 혼자 우리집을 찾아왔다. 늘 큰 딸아이와 함께 오던 것과는 달리. 아내가 차를 내오고 이런저런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누다 그 친구의 어색한 시간을 줄여주자는 생각에 "왠일로?"라는 질문을 아예 일찌감치 던져줬다.

망설임없이 "따님을 사랑하니 결혼하게 해주십시요"라고 바로 나왔다.

대충 짐작은 했지만 막상 그 소리를 들으니 뭐라고 대답해야하는 건지 잘 몰라 우리내외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곤 어색함을 간신히 누르고 "그래, 그러렴"이라 대답했고 아내도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나도 좋단다"라고 했다.

평소에 우리내외끼리 그 아이가 똑똑하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부모님 밑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며 자라왔고, 딸아이에게 자상하고 진실하게 대하는 것 같고, 성격이 온순하고, 마라토너로서 극기와 인내는 증명된 셈이고, 직장과 직장에서의 위치도 그만하면 됐고, 나름 잘생겼고...하며 사위로서는 더할나위 없겠다 이야기해 오던 터라 '먹여살릴 준비는 갖춰놓고 그런 생각을 하느냐' 아니면 '딴짓 안하고 잘 살수 있겠느냐'등 여자부모로서의 걱정섞인 까탈스러운 질문들은 생략했다.

아내가 내온 유자차의 향기를 맡으며 몇 모금 더 들이키니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된 듯 해 이야기를 꺼냈다. 큰 아이가 엄마뱃속에 있을때 부터 우리내외는 그 아이의 배우자를 위해 기도해 왔노라고. 그리고 이제 그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 같아 기쁘다고. 그랬더니 자신의 부모님 역시 오랜 시간 자신의 배우자를 위해 기도해 오셨다는 이야기를 한다.

모두 아침일찍 출근해야하는 처지들이라 오래 이야기는 못하고 보내려는데 부탁을 한다. 곧 프로포즈를 하려 하는데 그때까지는 딸에게 모른척 해주실 수 있느냐고.

문을 나서는 그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Are you really sure about this?"

웃자고 한 말이지만 인생에 있어서 제일 큰 결정중의 하나를 이 아이가 내린 것은 분명하다.


4/14/2014

진주혼

결혼기념일을 이야기할 때 1주년을 종이에 비유해 지혼(紙婚), 10주년은 주석혼(朱錫婚), 25주년은 은혼(銀婚), 50주년 결혼기념일은 금혼(金婚), 60주년은 금강혼(金剛婚) 혹은 회혼(回婚) 이라고 한단다.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에 비유해 종이(紙)에서 은과 금을 거쳐 다이아몬드(金剛)까지 점점 더 단단해지며 희귀해지는 물질로 옮겨간다.

며칠있으면 사람들 입에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진주(혹은 상아)혼이라 부르는 30주년.

결혼생활 거의 대부분은 아이들이 어려서, 아이들이 어느정도 커서는 편찮은 부모님이 계심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둘 다 지치고 늙어, 두사람만 어딜 다녀오는 것이 엄두가 나질 않았었으나 이제라도 좀 이기적이 되어야겠다 싶어 금년엔 용기를 냈다.

<Day 1-3>
그래서 떠나온 첫 장소는 집에서 멀지 않은 버지니아비치라는 바닷가. 일해야 하는 걱정, 누굴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 뭘 어떻게 해야 한다거나 뭘 하지 말아야 한다는 염려없이 그냥 뒹글거리다가 배 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배부르면 모래사장을 하염없이 걷고 하며 지내는 중인데 그러는 것이 괜히 불안하고, 일 안하고 놀고 먹는다고 뒷통수에 대고 누가 뭐라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떠나질 않는다.

오늘 아침은 눈이 조금 일찍 떠져서 아내가 일어날 때까지 베란다에 앉아 쏟아지는 아침햇살에 눈을 감고 잔잔하게 깨어지는 파도소리를 한참 듣고 있는데 옛날 생각이 영화장면들 처럼 지나가더라는...


17살 밖에 안된 앳되고, 한참 공부해야하는(고3) 처자였던 그녀를 밖으로 나데리고 다녔던 참으로 무책임했던 나, 그런 나를 싫은 기색없이 따라 나가지만 자신이 해야하는 공부는 열심히 해내던 모습, 나와 같은 과 친구였던 오빠와 하숙을 하며 부모님께서 보내주시는 빠듯한 지원이지만 알뜰하게 절약하며 거뜬히 오빠를 돌보던 모습, 대학진학을 하고 같은 또래의 학생들과 같이 가게되는 MT등은 나를 생각해서인지 스스로 포기하던 사람, 가끔 우리집이라도 방문해 부모님과 식사라도 할라치면 간단한 반찬거리를 사가지고 와 음식도 만들어 놓고 설거지도 하던 대학3-4년차, 미국으로 유학와 시집생활, 풀타임가게일, 풀타임 학교생활을 동시에 이어 나가면서도 군소리 한마디 없이 해내던  미국생활 초반,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소천하실때 까지 최선을 다해 모시는 모습에 자식인 날 부끄럽게 하던 그녀...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녀가 밑지는 장사같은데 다시 태어나도 날 만나겠다고 망설임없이 대답하는 그녀...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Day 3-4>
버지니아비치를 출발해 5시간 반 정도 운전해 블루릿지마운틴을 넘어가게 되면 웨스트버지니아로 채 못가서 버지니아의 산속에 위치한 Hot Spring이란 마을이 나온다, 그 곳에 위치한 다양한 형태의 온천장들이 허리가 안좋은 아내에게 좀 도움이 될까 하는 바램으로 왔다. 비용은 좀 부담스러웠지만 앞으로 살아생전에 몇번이나 더 오겠냐 싶어 온천수로 된 실내외수영장등을 잘 갖춰논 Homestead란 이 호텔에서 여장을 풀기로. 오른쪽의 사진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Jefferson Pool. 워낙 역사가 짧은 미국이라 조금 오래된 구조물이나 장소는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보존 관리하는 이곳 사람들답게 Homestead호텔도 300년, Jefferson Pool도 250년간 잘 보존해왔다고 자랑들이 대단하다. 반만년역사를 가진 우리가 볼 땐 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여간 도착당일 저녁과 다음날 아침에 걸쳐 내내 온천욕으로 시간을 보낼수 있어 좋았고. 때밀어주는 서비스도 있었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그게 내내 아쉬움으로...결혼기념으로 왔다고 하니까 100불짜리 음식쿠폰, 48불짜리 와인(메뉴를 보니), 카페에서 만드는 제대로 된 커피 2잔 등을 안겨주고 퇴실시간도 11시에서 오후 2시로 연기해 주는 등 받은게 많아 결과적으로 기존 호텔들보다 그리 많이 낸건 아니다 싶어 "격이 안 맞는 우리같은 사람들이 이런 고급스러운덴 뭣하러 왔누..."라고 내내 툴툴거리던 짠순이가 특히나 기뻐했다.

<Day 4-5>
2시간여 달려 둘째가 공부하고 있는 Charlottesville을 들려 둘째녀석을 불러냈다. 근래에 치과쪽으로 전공을 바꿔 스트레스가 심할텐데 이야기해 보니 잘 견뎌내고 있는듯 싶었고 같이 저녁을 맜있게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 1시간 후 둘째가 온라인으로 찾아준 Glass House Winery를 찾아가 그곳에서 운영하고 있는 Bed & Breakfast에 체크인을 했고. 온통 포도나무밭으로 둘러싸인 한편 아담한 호수를 담은 이 산꼭대기의 집에서 운치있는 하루를 보내는데 가지고 간 랩탑에 뜬 속보에 나온 진도 수학여행선 참사가 눈에 들어와 온 저녁을 애를 태우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내는 안타까와할 피해자 학부모들 생각에 내내 눈물만 흘리고. 투숙객들의 편의를 돕고 아침을 짓는 상냥한 아주머니가  내려 준 진한 향의 커피를 겸해 근사하게 차려놓은 아침상을 받아먹고는 떠나 2시간 후 그리던 집으로 돌아왔다.

6/18/2012

아름다운 결혼식, 즐거운 여행

조카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온 식구가 2박3일간의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러시지 못한 한국식구들을 위해 조금 적었다.

날씨도 계속 화창한 가운데 그리 덥지도 않았고, 예식준비나 피로연준비도 완벽했고, 예식 자체나 피로연도 실수나 불상사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참 좋다. 아내와 우리 아이들 셋도 오가는 여정이나 머무르는 동안 서로를 만끽하는 가운데 시종 깔깔대며 즐거운 휴가로 다녀왔다.

양쪽 어머니들의 한복차림을 제외한 모든 것이 철저하게 미국식으로 진행됨. 가족들의 일정은 예식 전날 시작되어 예식 다음 날 마무리 되었고, 장소도 18세기에(257년 됐단다) 지어진 컨트리클럽의 야외에서 진행되어 색다른 느낌이었음. 리치몬드에서 운전해 3시간 반 정도 걸리는 메릴랜드주의 한적한 산 속에 위치.

<예식 전날>
아침 11시: 신랑신부, 양가부모, 신랑신부 들러리들, 칼을 들고 Arch를 만들어 신랑신부가 통과하게 할 육군병원동료군의관들이 식장에 모여 일체의 순서를 3번 정도 반복함.

저녁 6시: 시내의 고풍스러운 식당에서 리허설에 참석했던 모든 인원이 저녁식사를 같이 함. 예식 당일 짧은 멘트와 함께 건배를 제의하게 될 사람은 딱 3명(Bride's maid of honor, Groom's best friend, Father of the bride)으로 정해져 있기에, 이 저녁식사 시간을 통해 신랑과 신부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친구들은 모두 나와 온갖 즐거웠던 추억들과 칭찬들을 이야기했는데 얼마나 재미있고 짓궂게 하는지 모두들 배꼽을 잡으며 즐거운 저녁식사 시간을 보냄.

<예식 당일>
저녁 6시: 모든 하객들이 정원에 자리한 가운데 바닥에 뿌려진 장미꽃잎들을 밟으면서 신랑, Groomsmen들, Bridesmaids들이 먼저 행진해 들어간 다음 아빠를 대신해 내가 조카를 입장시킴. 간단하게 식이 끝나고 성혼이 되었음을 선포. 나가는데 육군장교예복차림에 칼을 치켜 들어줘야 할 신랑동료들이 칼을 올리지 않고 막아선 채 뽀뽀를 한 번 더 하지 않으면 지나가지 못한다고 능청을 떨어 결국 뽀뽀를 하고 지나감. 그러고 나가는 신부의 엉덩이를 칼로 한대 탁 치는 것도 전통이란다. ㅎ ㅎ


이 장면에서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아름다와서 그랬나...
저녁 7시: 밖에 설치된 텐트에 피로연이 준비되어 있었고, 하객들이 자리한 가운데 가족과 신랑신부가 입장. 잘 준비된 식사가 무르익어 갈 무렵, Bride's maid of honor인 우리 큰 아이가 멘트를 하고 건배를 제의하는 것을 시작으로, Groom's best friend인 쌍동이 형, 그리고 내가 신부아빠의 자격으로 멘트를 하고 건배를 제의 했다. 그토록 조카의 결혼식만큼은 지켜보고 싶어 하셨던 할머니할아버지 이야기를 언급하던 순간엔 조카가 펑펑우는 걸 볼 수 있었고... 그 이후론 파티모드. 놀다 한밤중에 배가 고플까봐 아예 한쪽 구석에 버거킹에 주문해서 배달받은 햄버거 150개를 산처럼 쌓아 놓고, 각종 음료, DJ의 음악, 가터밸트 벗기기, 꽃 던지기, 츰 등으로 신나게 놀며 밤을 새는 젊은이들을 뒤로 하고 우리 구세대는 슬그머니 피로연장소를 빠져 나왔다.

<예식 다음날>
같은 호텔에 거의 모든 가족과 하객들이 의도적으로(호텔에서 식장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했기에) 묵었는데, 신랑신부가 9:30부터 11:30까지 식당에 머무면서 전날 참석했던 가족, 하객들과 아침식사를 같이 하고, 떠나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한사람 한사람 안아주며 감사의 말을 다시 해 주는 동시에 배웅하는 것 역시 참 좋았다고 느꼈다.

예식순서지에도 할머니할아버지를 추모하는 글을 일부러 적었고, 건물들어가는 입구에도 두분의 사진을 곁들여 추모하는 테이블을 만들어 놓을 정도로 각별했던 조카의 할머니할아버지 사랑을 엿볼 수 있었음.

<이 부부의 앞으로의 일정>
신혼여행을 하와이로 갔다가 와서는 짐을 모두 싸서 독일로 부치게 되고, 독일에 있는 미국병원에서 몇 년 근무하기 위해 7월 초순에 떠나게 된다고 한다. 군에서 주거비용을 엄청 지원해줘 군의관들은 대부분 큰 저택에서 살게 된다고 하는데, 미국이나 한국식구들이 놀러 오면 특별(?) 대우를 해 주겠다는 다짐을 받았음. ㅋ ㅋ ㅋ

얘들아, 행복하게 잘 살거라!  내가 피로연때 너희들에게 부탁한 말 잊지말고. (Have God in common. Then He will bond you together and bless your marriage!)

컨트리클럽의 전경

정원의 식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멀리서 본 식장

피로연이 열릴 텐트

텐트내부의 피로연 테이블셋업

신부대기실에서



First kiss
Saber Arch

First dance
Cake cutting
우리 큰딸이 직접 진흙을 굽고 깍아서 만든 케익 데코레이션
신부가 던지는 부케를 기다리는 처녀들

조카의 garter belt를 벗겨내는 신랑

garter belt(양말대님)을 초조히 기다리는 총각들
한술도 못 먹었겠지만 마냥 행복한 신랑신부
Party time!
 


밤새 이어지는 파티

4/28/2012

28주년


Source: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ICyN&articleno=4635116#ajax_history_home
한 십오년 쯤 전 인가 묘지이장작업을 하던 중 발견된 조선조 시대의 관 안에서 애절한 망부가가 나와 세상이 떠들썩 해 진 적이 있었다.

삼십이 갓 넘은 나이로 요절한 남편을 떠나 보내며 적은 부인의 절절함이 담긴 한글편지와 부인 자신의 머리칼을 넣어 삼은 미투리(짚신처럼 볏짚으로 삼지 않고 삼을 주재료로 삼은) 한짝이 420년의 세월이 지난 후, 디지털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울렸었다.

원이 아버지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 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갖 그 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현대어 옮김-임세권안동대사학과교수)

그 당시에는 "응, 그것 참 희안한 발견이다"하고 무심하게 지나갔는데 지금은 눈물없이는 끝까지 읽어 내려갈 수가 없다. 특별히 실제편지 사진을 보면 그 부인이 쓰다가 쓰다가 아쉬움에 글이 길어지니 위의 남은 여백에다 옆으로 계속 더하여 써 내려간 것에 이르면 그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져 내 마음이 다 무너진다.

어느 시점에는 누가 먼저 가든 이런 이별의 시간이 오겠지... 지금 최선을 다해 서로의 귀함을 확인하고 위해 주는 것 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

금년과 내년에는 여전히 맨입이지만 30주년에는 남들 처럼 어디 먼 곳으로 여행이라도 가 봅시다. 무슨 홍상수 영화처럼 어색하고 엉뚱했던 우리의 처음 만남과 그 이후에도 우여곡절이 꽤나 많았던  28년 지난 세월...

함께 축하합니다, 당신.

8/08/2011

Formula XYZ


그림출처: http://bbaggoom.tistory.com/239
 개학이 가까와 지면서 직장일도 바빠지고, 기타 다른 이런저런 일 들로 차분히 앉아 책을 읽는 것은 커녕 이메일 읽는 것 조차 여의치 않은 요즘.

어제는 짜투리 시간이 조금 나길래 오래 전 읽다가 내려 놨던 Dr. Les and Lesley부부의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marriages"라는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지혜의 조언들을 담았는지 매 30초 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할 정도. 결혼을 앞둔 부부, 부부간에 문제가 생겨 금이 가기 시작한 부부, 이미 절단이 날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이른 부부 등 수십년에 걸쳐 많은 부부들을 상담했던 이 전문가내외가 금쪽같은 경험을 통해 문제를 대비하고 피해갈 수 있는 길을 굉장히 구체적인 실례를 통해 보여준다.

간단한 한 예로 대화시 XYZ공식이란 것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데 우리 부부는 10여년 전 교회에서 카운셀링을 전공한 한 전도사님으로부터 훈련을 받아 계속 사용해 오던 방법.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면서도 사용할 때마다 우리 내외는 깜짝 놀라곤 한다.

가령 내가 밥을 먹을 때 짭짭대면서 먹는데(진짜로) 아내가 그 모습을 보고

"거 무슨 돼지처럼 짭짭대면서 먹지좀 마!" 할 수 있는 걸
"당신이 밥을 먹을 때(X라는 상황) 그렇게 소리를 내서 먹으면(Y라는 상대방의 행동) 보기가 좀 민망해요(나는 Z라고 느낀다)"라고 한다는 거다.

근데 희안한 건 전자처럼 말을 했다면 버럭 화를 내며 금새 싸움으로 번질 소지가 있지만, 후자의 경우 싸움으로 가는 경우는 드물고 상대방이 순순히 받아 들이게 된다는 거다. 꼭 부부간의 대화에 한정된 것은 아니고 일반적인 대화에 사용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 아들녀석이 다음 날 학교에 가야 하는데 밤을 새워 온라인게임을 한다고 하자. 내가 그걸 보고

"야 이 자슥아! 너 뭐가 될려고 그렇게 게임만 하고 있어?" 할 수 있는 걸
"야 네가 자야하는 시간인데(X라는 상황) 그렇게 게임만 하고 있는 걸 보니(Y라는 상대방의 행동)  아빠가 많이 걱정이 되는구나(나는 Z라고 느낀다)"라고 한다는 거다.

처음엔 우리 부부도 좀 어색해서 킥킥 대면서 억지로 하듯 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누구와 대화를 해도 자연스레 이 방식으로 말이 나오고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걸 거듭 경험하게 된다. 이런 간단한 대화의 기술(XYZ공식)에 의해 싸움이 될 만한 대화들이 긍정적인 대화로 유도 되어 질 수 있다면 하는 바램으로 여기에 끄적여 본다. ^^

4/27/2011

27주년

삐지기도 잘 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다투던 연애시절과 20대 신혼시절이 생각난다. 서로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삶을 공유하게 되면서 겪게되는 진통이었으리라.

그 이후로는 각자 자신의 모난 부분을 스스로 깍아내기도 하고 상대의 그런 부분을 아프지 않게 깍아주기도 하며 서로가 좀 더 둥글어 지려고 애쓰며 살아온 것 같다. 이제는 서로의 약점과 장점, 버릇과 취향을 속속들이 숙지하고 있으니 내외간에 무슨 실수를 해도 픽 웃으며 서로 덮어주는 쪽으로 가는 것 같고.

그래도 일년에 한 두 번 정도는 서로에게 순간적으로 화가 꽤 나는 경우가 생기긴 하는데, 그럴 땐 마치 약속한 것 처럼 그 자리에서는 입을 꾹 다물고 그냥 하루 반나절정도를 지낸다. 그리고는 감정이 가라앉은 다음에 솔직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다시 나누게 되고...결국에는 백이면 백 두 사람 다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게 되는 것으로 끝나기에 싸움이라는 게 좀 싱겁다.

누구나 발에 잘 맞고 편하게 신는 신발 한 두 켤레는 있지 않나 싶다. 그것만 신으면 발이 편하고 안락하리라는 것, 아무리 거친 길을 오래 걸어도 물집도 생기지 않고 별 일 없을거라는 확신이 있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기까지 27년(내일이면)이 걸렸다.

이런 상태에서 서로를 더 위해주고 아껴주고 싶은데 이젠 거꾸로 남은 시간을 세어 나가야하는 얼마 남지않은 우리의 나이이기에 그 사람이 더 귀하고 소중하다.

4/29/2010

26th anniversary

어제 4월 28일이 우리 결혼 26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사무실에 있는 여자 두 사람에게 물었다. 뭐 듣고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고 그냥 어떻게들 하는지 알고는 싶었기에 "너희 남편들은 결혼기념일에 어떤걸 하니?" 했더니 하는 얘기들은 대충 이렇다. 10, 15,20,25, 30…등으로 끊어지는 때는 멕시코, 지중해크루즈등 조금 먼데로 여행을 가거나 보석등의 큰 선물을 해주고, 그렇지 않은 해에는 간단하게 분위기 있는데서 저녁식사를 하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러면서 너 아직 아무 계획이 없었으면 더 늦기전에 지금이라도 당장 장미꽃 한다발이라도 전화 주문해서 아내에게 배달하라는 긴급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하루종일 전전긍긍하다가 시간이 다 가버리고 말았다. 뭘 해도 아내가 불필요한 지출이라고 할 게 뻔하기에… 오후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우리 26주년인데…” “어머 그러네?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결혼기념일도 잊고 있었네.” “근데 뭐 특별히 하지 않을껀데…?” “당연하쥐, 우리끼리 그런거 따지거나 챙기지 않기로 했잖아?”하고 돌아오는 아내의 대답이 명랑하고 밝아 고마웠다. 사실 그랬다. 서로의 생일도 그냥 서로 그 날짜를 기억해 주고 말로 축하하는 것으로 대신 했었고, 크리스마스때 조차 아이들, 어르신들 것만 챙기고 서로를 위해서는 생략한다. 넘치는 재정형편도 아니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지만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우리 두 몸뚱아리를 위해 쓰는 것 보다는 주위의 어려운 가족/친지나 이웃을 위해 쓰고 싶은 바램이 우리에게 있기에. 그런데 정말 아내가 섭섭해 하는 마음이 없을까? 정말 그럴거라고 믿고 싶은 내가 바보같은 놈 일께다.

고마운 사람. 사랑스러운 사람. 내가 어떤 분에게 말한 적이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받은 큰 축복중  두가지만 말해보라면 하나는 하나님을 알게된 것이고, 두번째는 아내를 만난 것이라고. 정말이다.

8/21/2009

Honeymooning for 25 years and more

결혼한 지 25년, 그리고 연애기간을 더하면 한 30년을 아내와 같이 했다. 길다면 긴 세월이다. 헌데 아직 신혼같은 기분이다. 아내에게 그런 느낌이 아직도 드냐고 물어 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아직 연애하는 것 같이 얼굴을 볼 때 마다 사랑스럽다.

반정부데모가 한창이던 80년대 초 어느날 밤 남대문에서 큰 데모가 있었다. 아직도 80년초 데모를 언급할 때면 늘 쓰이는 상징적인 사진들이 있다. 그 가운데 남대문광장 바로 앞에서 시내버스가 불타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 내가 한 친구와 같이 있었다. 같은 스쿠버다이빙팀소속 친구였는데 통금시간 경찰을 피해 이골목 저골목을 누비며 새벽녘에야 그 친구 자취집에 도착했다. 방으로 들어서니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있던 고3 여동생이 돌아오는 오빠를 맞이 하면서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 라면을 끓여 내왔다. 그것이 이 긴 인연의 시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결혼할 때 난 24 그리고 아내는 21살 이였는데도 양가의 어르신중에 너무 어리다고 반대하신 분이 없으셨던 것이 우리에겐 참으로 다행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24+21살의 결혼은 파격적인 일이였다. 학교는 대리출석으로 때우면서 이틀이 멀다하고 사라져 하얀 눈 덮인 산꼭대기에 천막을 치고 며칠을 혼자 지내는가 하면 어느 이름없는 동해안 바닷가에서 잠수로 세월을 보내는, 영 사람구실 할 것 같이 보이지 않는 아들의 장래가 심히 걱정스러우셨던 탓에 서울대장학생아가씨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하니 웬 떡이냐 싶으셔서 아가씨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치뤄버리자 하는 심정으로 우리 부모님이 서두르셨던 것 같다.

그 후 신방을 차리기가 무섭게 유학을 떠나 버린 신랑. 신랑도 없이 학교다니며 시집생활을 해야 했던 몇 년. 자신도 유학생으로 도미해 새로운 전공으로 학교를 다니는 동시에 나와 함께 가게를 꾸려가야했던 몇 년. 그 후 이제까지 내내 시부모님을 모시고 생활을 해 온게 결혼해 지내온 햇수와 같은 25년이다. 참 많이 힘든 생활이었을 텐데도 지금까지 묵묵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준 사람. 아이들을 낳아 이쁘고 건강하게 잘 키워준 사람. 가게에서 무거운 것을 오랫동안 들어온 탓으로 지금은 그 후유증인 허리통증으로 늘 고통스러워 하는 그 사람. 남편을 원망하거나 기죽일 소리는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 지내왔다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정말 그래왔던 사람.

오늘 아침에 큰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길에 딸아이와 이야기했다.
"I love your mom so much and I can't help it."
"I know that, dad. She, too, always says the same thing about you to me."
"I feel like I am still honeymooning with your mom. That feeling is as fresh and real as the day 1 of our honeymoon and hasn't changed a bit."

신혼여행 첫 날

그 아이가 깔깔대고 웃었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신혼같은 기분으로 살 꺼라고 딸아이에게 감히 이야기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이 내 노력이나 나의 의지로 가능했던 일이 아니고 앞으로도 그 분이 허락하시는 은혜가 아니면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