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내가 말 못할까봐 보내놓는다... 사랑해."
침몰한 여객선에 타고 있던 한 학생의 문자메세지라고 한다. 이렇게 멀리서 남의 일처럼 소식을 접하는 우리도 눈물이 나고 억장이 무너지는데 그 부모들은 어떨지 감히 상상이 안간다.
생각해보니 나라고 하나도 나은 입장은 아닌 것 같다. 오늘 밤 세수하고 양치질한 후 잠자리에 들 때 내일 아침에도 평소와 같이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있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아침에 일을 나서면서 나갔던 그 모습 그대로 저녁시간에 다시 귀가할 수 있다는 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빠이 하면서 차를 몰고 떠난 아이가 목적지에 온전히 도착하리란 확신은 무엇에 근거를 둔 것인가?
이 글을 긁적이다가 전화를 꺼내들고 아이들과 아내에게 뜬금없이 문자를 날렸다.
"I love you!"
자주 이 말을 해줘야겠다. 그리고 가능하면 구체적인 행동으로 하나 하나에게 관심을 보여야겠다. 그냥 있어줘서 고맙다는 말도 해야지. 가족뿐만이 아니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미워하고 다른 사람들 잘못하는 걸 고치려 들기에는 너무나도 짧고 귀한 시간이 나에게 남아있다. (몇 초 후에 어떻게 나의 생이 마감될 지 모르니)
그 귀한 시간을 사랑하고 감사해하고, 위해주고 격려함으로 보내기로 작정하는 지금 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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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2014
4/12/2013
A father's love
집으로 들어서는데 큰 아이가 이층계단위에서 날 반긴다. 훌쩍거리기에 자세히 얼굴을 살피니 한참을 운 얼굴이다.
"무슨일이 있니?"
"응, 무슨일이 생긴 건 아니고 예전에 팔로우하던 블로그가 있었는데 그걸 다시 찾아가 읽으면서 너무 슬퍼서 울었어."
그러면서 그 블로그를 소개해 주길래 가서 한동안 차분히 읽었다. 미 서부의 어느 곳에 사는 한 아빠가 몇개월 전 세상을 떠난 큰 아들의 암투병과 그 이후 나머지 가족들이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데...
초반부터 근래의 포스팅까지 읽어오면서 그 아빠의 아들을 향한 절절한 사랑과 그리움, 가슴아파하는 모습에 나 역시 엉엉 울고 말았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지요..." 하지 않고 "왜, 사랑스런 그 아이를 데려가셨어요?" 묻는 아빠의 울부짖음에, 나머지 가족들이 자신들의 평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하는 중 상실감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모습들에, 지체아 교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힘을 받는 듯 하지만 시도때도 없이 몰려오는 그리움과 슬픔을 혹독하리 만큼 솔직하게 표현한 그 아빠의 글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영어권 가족이지만 한인임에는 틀림없는 듯. 여길 들리는 블로거이웃께서도 이 가족을 위해 기도와 위로 부탁드립니다.
2/19/2012
Regrets
어머니가 돌아 가시기 며칠 전 호스피스전문의와 간호원이 우리 가족에게 이야기 해 준 것이 있다.
눈은 가끔 뜨고 계시지만 의식이 있어서 그러시는 건 아니고, 앞으로 장기가 하나 둘 정지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생명의 불꽃이 사그러 들 거라는...그렇지만 듣는 기능만은 마지막 순간까지 있으실 거니 가족들끼리 이야기를 하더라도 말을 조심해야 하며 어머니에게 정상인 분 처럼 이야기를 계속 해 드리라고 했다.
그래 가족이나 교인들이 방문이라도 하면 누가 왔다고 어머니 귀에 대고 설명을 해 드리곤 했고, 어머니 병세나 상태에 관해서 다른 사람과 이야길 할 땐 복도에 나와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어머니 호흡이 가빠지시면서 몹시 불규칙해 졌던 마지막 몇 분...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어머니 할머니를 안아드리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라고 내가 지시했고 아이들까지 모두들 작별인사를 끝낸 후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안아드리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이제 저희들 걱정 마시고 편히 가세요. 주님께 먼저 가 계시면 저희들도 곧 갈께요. 사랑해요!"라고. 내가 말을 마치자 마자 어머니가 크게 숨을 한 번 내쉬시고는 온 힘을 모아 마지막 한 마디를 하셨다. "xx아!" 그리곤 바로 호흡을 멈추셨다.
오랜시간 의식이 없으셨기에 무슨 말씀을 하실 거라고는 모두 기대를 안 하기도 했고, 듣는 것에 집중을 안하고 있던 터라 그게 무슨 말씀이셨는지 순간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그게 내 이름을 부르신 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누님들이 "얘, 네 이름을 부르신 것 같다"라고 해 줬다.
내 이름을 부르신 건 정말 소리를 인지하고 계셨다는 건가...
근데...이런 기억을 떠올리며 가슴이 무너져 내린 건...호스피스 전문의와 간호원이 들으실 수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 주기 전에 그걸 모르고 이미 실수를 했다는 것. 누가 방문을 해서 상태를 물어보면 이제 우리와 함께 며칠 더 못 계실 거라는 이야기를 해 주곤 했는데 어머니가 당연히 못 들으실 거라는 생각에 어머니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기억이 나는 거였다.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멀쩡한 나를 앞에 두고 왜 저런 소리들을 할까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억장이 무너진다.
눈은 가끔 뜨고 계시지만 의식이 있어서 그러시는 건 아니고, 앞으로 장기가 하나 둘 정지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생명의 불꽃이 사그러 들 거라는...그렇지만 듣는 기능만은 마지막 순간까지 있으실 거니 가족들끼리 이야기를 하더라도 말을 조심해야 하며 어머니에게 정상인 분 처럼 이야기를 계속 해 드리라고 했다.
그래 가족이나 교인들이 방문이라도 하면 누가 왔다고 어머니 귀에 대고 설명을 해 드리곤 했고, 어머니 병세나 상태에 관해서 다른 사람과 이야길 할 땐 복도에 나와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어머니 호흡이 가빠지시면서 몹시 불규칙해 졌던 마지막 몇 분...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어머니 할머니를 안아드리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라고 내가 지시했고 아이들까지 모두들 작별인사를 끝낸 후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안아드리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이제 저희들 걱정 마시고 편히 가세요. 주님께 먼저 가 계시면 저희들도 곧 갈께요. 사랑해요!"라고. 내가 말을 마치자 마자 어머니가 크게 숨을 한 번 내쉬시고는 온 힘을 모아 마지막 한 마디를 하셨다. "xx아!" 그리곤 바로 호흡을 멈추셨다.
오랜시간 의식이 없으셨기에 무슨 말씀을 하실 거라고는 모두 기대를 안 하기도 했고, 듣는 것에 집중을 안하고 있던 터라 그게 무슨 말씀이셨는지 순간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그게 내 이름을 부르신 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누님들이 "얘, 네 이름을 부르신 것 같다"라고 해 줬다.
내 이름을 부르신 건 정말 소리를 인지하고 계셨다는 건가...
근데...이런 기억을 떠올리며 가슴이 무너져 내린 건...호스피스 전문의와 간호원이 들으실 수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 주기 전에 그걸 모르고 이미 실수를 했다는 것. 누가 방문을 해서 상태를 물어보면 이제 우리와 함께 며칠 더 못 계실 거라는 이야기를 해 주곤 했는데 어머니가 당연히 못 들으실 거라는 생각에 어머니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기억이 나는 거였다.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멀쩡한 나를 앞에 두고 왜 저런 소리들을 할까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억장이 무너진다.
6/23/2011
엄마를 보내드리고
엄마를 하나님품으로 보내드린지 나흘이 지났다.
한국과 미국각지에 흩어져 있던 모든 형제와 그 자녀손들이 모두 모여 엄마를 위해 찬송과 기도를 드리는 중 주무시듯 너무 편안한 모습으로 소천하셨다. 그것도 모인 가족 한사람 한사람이 엄마를 안아드리고 마지막인사를 드리는 걸 마칠때까지 기다려주셨다가 마지막 가족이 인사를 마침과 동시에 떠나셨다.
마음은 무너지지만 그래도 참 잘 살으셨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좋다. 여느 어머니라도 그러셨겠지만 다섯형제를 모진 고생끝에 건강하게 키워내고, 모두 대학보내고, 시집장가 보내고, 손주들까지 당신 손으로 모두 키워내셨고, 온 식구를 믿음의 사람으로 이끄셨으니 누가 아무리 유명한 사람의 전기를 내게 들이 밀어도 내게는 엄마만큼 위대한 분이 없다.
한편으론 무섭고 엄한 분 이셨다. 내가 혼날 짓을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기도 했지만 그 벌은 혹독했다. '쌩'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도대체가 피할길이 없었던 굵직한 나무 빗자루의 손잡이는 늘 내 몫 이었고. 내 머리가 좀 크고 엄마연세가 조금 더 드셨을 땐 한 손으로 날라오는 빗자루를 탁 잡으면서 "거 좀 그러지 맙시다, 내가 이젠 뭐 애도 아니고." 하면서 엄마를 타일렀던 기억이 나기도 하고. ^^
그렇게 무서운 분 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엄마를 조금 알게 된 일이 있었다. 중학3학년쯤 됐을라나...나하고 어디 좀 가봐야 할 데가 있으니 앞장서라고 하셨고, 평소 우리 형제들에게도 잘 사주시지 않던 맛난 사탕과 과자, 아이들 옷가지와 양말등을 바리바리 사서 내게 지워갖고 찾아간 곳은 지체부자유/정신박약아동들만 있는 고아원이었다. 보모들에게 선물 나눠주는 걸 부탁하시고 바로 두 팔을 걷어 붙이시고 아이들 목욕시키시기를 시작하시는데 한 두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슬쩍 물어봤다. "엄마, 여기 가끔 와?" "이 아이들은 엄마아빠가 없단다. 그래서 명절이 가까와지면 이렇게 찾아 보려고 하는데 그게 그리 쉽지 않아..." 그 일은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몸소 보여주신 엄마의 가르침으로서 내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며칠 전 리치몬드에 있는 셋째 누나로 부터 처음 들은 이야기. 오래 전 서울장로회신학대학교에 엄마가 장학금을 기탁하셨었는데 그 당시 그 혜택을 받았던 가난한 신학생이 후일 목사님이 되어서 이야기 한 것을 전해들었다고 하면서 그 목사님이 자신이 학업을 포기해야만 할 절박한 상황중에 그 장학금을 받았었노라고 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식구들도 몰랐던 이야기다.
살아계실제 효도를 했어야지 돌아가신 다음에 이렇게 고인을 칭찬하며 기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기록을 해 두지 않으면 이런 이야기들을 잊어 버릴수도 있겠다는 마음에 적어논다...
한국과 미국각지에 흩어져 있던 모든 형제와 그 자녀손들이 모두 모여 엄마를 위해 찬송과 기도를 드리는 중 주무시듯 너무 편안한 모습으로 소천하셨다. 그것도 모인 가족 한사람 한사람이 엄마를 안아드리고 마지막인사를 드리는 걸 마칠때까지 기다려주셨다가 마지막 가족이 인사를 마침과 동시에 떠나셨다.
마음은 무너지지만 그래도 참 잘 살으셨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좋다. 여느 어머니라도 그러셨겠지만 다섯형제를 모진 고생끝에 건강하게 키워내고, 모두 대학보내고, 시집장가 보내고, 손주들까지 당신 손으로 모두 키워내셨고, 온 식구를 믿음의 사람으로 이끄셨으니 누가 아무리 유명한 사람의 전기를 내게 들이 밀어도 내게는 엄마만큼 위대한 분이 없다.
한편으론 무섭고 엄한 분 이셨다. 내가 혼날 짓을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기도 했지만 그 벌은 혹독했다. '쌩'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도대체가 피할길이 없었던 굵직한 나무 빗자루의 손잡이는 늘 내 몫 이었고. 내 머리가 좀 크고 엄마연세가 조금 더 드셨을 땐 한 손으로 날라오는 빗자루를 탁 잡으면서 "거 좀 그러지 맙시다, 내가 이젠 뭐 애도 아니고." 하면서 엄마를 타일렀던 기억이 나기도 하고. ^^
그렇게 무서운 분 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엄마를 조금 알게 된 일이 있었다. 중학3학년쯤 됐을라나...나하고 어디 좀 가봐야 할 데가 있으니 앞장서라고 하셨고, 평소 우리 형제들에게도 잘 사주시지 않던 맛난 사탕과 과자, 아이들 옷가지와 양말등을 바리바리 사서 내게 지워갖고 찾아간 곳은 지체부자유/정신박약아동들만 있는 고아원이었다. 보모들에게 선물 나눠주는 걸 부탁하시고 바로 두 팔을 걷어 붙이시고 아이들 목욕시키시기를 시작하시는데 한 두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슬쩍 물어봤다. "엄마, 여기 가끔 와?" "이 아이들은 엄마아빠가 없단다. 그래서 명절이 가까와지면 이렇게 찾아 보려고 하는데 그게 그리 쉽지 않아..." 그 일은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몸소 보여주신 엄마의 가르침으로서 내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며칠 전 리치몬드에 있는 셋째 누나로 부터 처음 들은 이야기. 오래 전 서울장로회신학대학교에 엄마가 장학금을 기탁하셨었는데 그 당시 그 혜택을 받았던 가난한 신학생이 후일 목사님이 되어서 이야기 한 것을 전해들었다고 하면서 그 목사님이 자신이 학업을 포기해야만 할 절박한 상황중에 그 장학금을 받았었노라고 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식구들도 몰랐던 이야기다.
살아계실제 효도를 했어야지 돌아가신 다음에 이렇게 고인을 칭찬하며 기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기록을 해 두지 않으면 이런 이야기들을 잊어 버릴수도 있겠다는 마음에 적어논다...
5/05/2011
Losing a best friend
![]() |
In memory of Avery Spence |
얼마나 친했던지 일주일에도 며칠을 그 아이가 우리집에 와서 자고, 우리 아이가 그 집에 가서 자곤 하면서 서로 'Best friend'라 부르며 죽고 못살던 사이. 학교 여자축구부 주장으로 운동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잘하고, 봉사활동도 정말 열심히 해 친구들 사이에선 수퍼우먼으로 불리던 아인데...
학교 건너편의 교회에서 했는데 2층까지 꽉 채운 조문객이 1500여명은 되어 보였고, 우리 딸을 포함한 여러 친구, 선생들이 나와 생전의 그 아이를 떠올리면서 이야기들을 하는데 모두 웃다 울다 다시 웃다가 또 우느라 바빴다. 파워포인트로 보여주는 사진중에 우리 둘째와 같이 찍은 사진이 제일 많았다. 엄마아빠는 도리어 조문온 딸의 친구들을 일일이 안아주고 위로하고 있었는데 어쩜 저리 차분할까 싶었다. 가슴속은 찢어지고 있을텐데...
<혹 미국 장례문화를 알고 싶은 분이 있을까 참고로>
미국의 장례는 보통 Visitation Service(혹은 Viewing), Memorial Service(혹은 Funeral), 그리고 Burial Service의 세 서비스로 이루어 지는데, 오늘 다녀온 건 Memorial Service였다. 가족에 따라 Memorial Service가 끝난 후에 Luncheon을 준비해 조문객들을 초대 하기도 하지만 요즘은 많이 생략하는 편.
Visitation(Viewing) Service에는 고인을 깨끗하게 단장하고 관뚜꼉을 열어놓아 가족과 방문객이 고인을 기억하고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일반적으로 다음날 아침 있게되는 Memorial Service(Funeral) 전날 저녁에 비교적 간략하게 장의사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많은 한인들은 가게를 열어야 하는 사정으로 인해 다음날 아침에 있을 Memorial Service(Funeral)에 참석이 힘들어 밤 시간에 있는 이 Visitation(Viewing)에 가장 많이 참석하는데 미주한인들은 바로 이 서비스를 'Funeral'이라고 여기고 유족도 그리알고 준비한다.
Memorial Service(Funeral)는 고인을 평소에 다니던 교회등의 장소로 옮겨서 주로 예배형식으로 성직자의 집전하에 치루게 되는데 가족이나 친구중에서 조사를 읽고, 나머지 시간은 누구든지 나와서 예전의 고인의 좋았던 기억들을 짧게 이야기 할 수 있게 기회가 주어진다. 주로 고인으로 인해 재미있었던 일, 기뻤던 이야기들을 하면서 고인을 기념하는 하나의 축제와 잔치로 진행된다. 사진과 비디오등을 모아 파워포인트나 DVD로 보여주기도 하고. 많은 웃음이 있지만 역시 무거운 건 지울 수 없고. 여기서 유족이 '곡'을 하는 건 미국에서 만큼은 한국사람들 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든 넌센스로 여기는 듯 하다. 미국사람들은 이 서비스에 제일 많이 참석하고 진행하는데 비해 한인들은 가족과 집례자, 아주 친한 친구들만 참가해 장지로 떠나기 전에 매우 간략하게 한다.
Burial Service는 장지에서 이루어 지는데 집전자의 간단한 설교나 기도에 이어 매장하는 절차를 친행한다. 묘지관리인들이 도르레를 이용하여 관을 바닥으로 내려 놓으면 가족과 참석자들이 꽃 한송이씩을 관위에 던져넣는 걸 마지막으로 장례절차가 완전히 마치게 되는데 나머지 흙을 덮는 일은 묘지관리인들만 남아서 하게 된다. Memorial Service(Funeral)를 마치고 장지로 이동할 때는 동네경찰차들 몇대가 동원되어(해당 경찰서에 수고비를 줘야 하는 것 맞고) 운구차를 앞세운 조문객들의 차량행렬이 신호등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사거리마다 막고 이동을 시키는데 조문객의 수가 많으면 길이 20-30분 막히는 수도 있고, 장례행렬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낮에도 조문객들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모두 켜고 달리게 된다.
Luncheon에서는 Memorial Service(Funeral)를 진행한 교회나 장소, 혹은 고인의 집으로 가서 준비된 간단한 식사나 스낵을 먹게 되는데, 요즘 우리 한인들은 주로 한국식당을 빌리거나 미리 주문하여 준비한 김밥/도시락등을 장지에서 나눠줘서 해결한다.
8/09/2010
Fallen Heroes: Korean-American soldier
자식을 전쟁에 잃은 한인부모의 안타까운 모습이 또 올라왔다 ( http://www.ocregister.com/news/lim-260249-killed-afghanistan.html).
자식을 군대에 보내고 다치거나 생명을 빼앗기는 아픔을 당하는 부모마음이야 그곳이 아프간이 됐던 이라크건, 아니면 미국내에 있는 부대건, 그 부모가 미국인 부모건 다른 나라출신의 부모건 그 아픔은 모두 매 한 가지 일 것 이리라. 직접 겪는 당사자들이 아니면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일 것. 촌 구석에 있는 중소교회인 우리 교회만 해도 이라크나 아프간으로 파병되었었거나 현재 파병되어 있는 아들들이 둘이나 있으니 한인이 많은 캘리포니아나 뉴욕지역은 오죽하랴.
Kevin Bacon이 나오는 Taking Chance(http://www.youtube.com/watch?v=MtmiLdzzgGE)라는 영화를 오래 전 본 적이 있다. 대충 기억나는 내용은…실제 전장에서 싸워보지 못한(사무실에서만 근무해 죄책감이 드는) 미 육군중령인 이 사람이 중동에서 죽어나오는 병사들을 위해 자신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한 병사의 시신을 집까지 운반하는 자원봉사를 하게 된다. 그러는 하나 하나의 과정을 통해 미국국민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병사들을 감사해 하고 가슴아파 하는지를 이 영화는 절절히 그려낸다.
무슨 시험보듯이 운구지원자들을 깐깐하게 인터뷰하고, 훈련하고, 임무를 맡기는 군당국의 철저한 책임감과 성의, 중동에서 막 도착한 시신을 맞이하는 정중한 의장대 사열, 중동에서 부터 담아 온 시신을 냉동 관에서 꺼내어 말끔하게 씻기어 예복을 입히고 최고급 관으로 옮기는 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기도하듯이 정말 소중하게 시신을 닦고 치장하는 모습, 장거리 이동을 하기 위한 비행기탑승시 그 임무를 알아보고 아무말 없이 이 장교의 좌석을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 해주는 항공사직원, 비행기를 착륙시키면서 안내방송을 통해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한 병사의 시신을 비행기로 운구하는 영광을 자신이 누렸다고 말하는 기장, 부모가 있는 시골집에서 좀 먼 위치의 공항에 도착해 화물과 함께 관이 내려오는데 공항화물을 다루는 일군들이 모두 일손을 놓고들 와서 일렬로 관이 내려오는 걸 맞으며 숙연히 경의을 표하는 모습, 그 다음날 공항에서 부모의 집으로 떠나기 위해선 잠을 청해야 하는데 나라에서 예약해 놓은 좋은 호텔을 마다하고 죽은 병사를 혼자 공항창고에 놔두기 싫어 관 옆에서 새우잠을 자려하는 이 장교, 그걸 보고 마무말 없이 간이침대를 내어오는 어느 노인 공항창고근로자, 집으로 향하는 하이웨이 선상에서 차 창문을 통해 밖으로 보이는 병사의 관을 알아본 지나가는 운전자들이 모두 헤드라이트를 점등하고 앞에선 트레일러트럭이 운구차를 이끌고 운구차 뒤로는 줄줄이 뒤 따라 가며 병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려는 일반인들의 모습들, 한 병사의 장례식을 위해 파견된 그 수많은 의장대원들과 나팔수, 관을 덮었던 삼각으로 접힌 성조기를 엄마에게 건네는 모습.
이 영화는 그냥 한 장교가 관을 차에 싣고 전사자의 유해를 가족에게 전해 주기 까지의 장정을 보여주는게 전부인 어떻게 보면 무미건조한 영화다. 재미를 위해 잠깐의 전투장면, 웃기는 이야기, 요즘 영화에서 혹 빠지면 장사가 안되는 반라의 남녀 등은 전혀 볼 수 없다. 흥행은 고사하고 개봉관에 채 나가 보지도 못하고 바로 DVD로 출시되었을 듯 싶다. 지루할 수도 있는 영화인데 난 보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위의 Daniel Lim 군의 장례도 동영상을 보니 예외없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 장례다. 부모에게 죽은 아들을 앞에 놓고 예의를 갖추어 주는 게 무슨 소용이랴 만은 그래도 그 분들의 아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나라를 위해 기꺼이 젊은 목숨을 바쳤고, 모든 미국민들이 그걸 다 알고 감사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인해 오는 위로는 최소한 줄 수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이렇게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려서 고인을 추모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해 여기에 올려본다.
****아, 그리고 아래의 링크는 방금 조카가 여기에 올려달라고 댓글을 달았기에...이건...임무를 마치고 살아서 귀환하는 병사들과 그 가족들의 Happy ending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uSMlIM9zLio

무슨 시험보듯이 운구지원자들을 깐깐하게 인터뷰하고, 훈련하고, 임무를 맡기는 군당국의 철저한 책임감과 성의, 중동에서 막 도착한 시신을 맞이하는 정중한 의장대 사열, 중동에서 부터 담아 온 시신을 냉동 관에서 꺼내어 말끔하게 씻기어 예복을 입히고 최고급 관으로 옮기는 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기도하듯이 정말 소중하게 시신을 닦고 치장하는 모습, 장거리 이동을 하기 위한 비행기탑승시 그 임무를 알아보고 아무말 없이 이 장교의 좌석을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 해주는 항공사직원, 비행기를 착륙시키면서 안내방송을 통해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한 병사의 시신을 비행기로 운구하는 영광을 자신이 누렸다고 말하는 기장, 부모가 있는 시골집에서 좀 먼 위치의 공항에 도착해 화물과 함께 관이 내려오는데 공항화물을 다루는 일군들이 모두 일손을 놓고들 와서 일렬로 관이 내려오는 걸 맞으며 숙연히 경의을 표하는 모습, 그 다음날 공항에서 부모의 집으로 떠나기 위해선 잠을 청해야 하는데 나라에서 예약해 놓은 좋은 호텔을 마다하고 죽은 병사를 혼자 공항창고에 놔두기 싫어 관 옆에서 새우잠을 자려하는 이 장교, 그걸 보고 마무말 없이 간이침대를 내어오는 어느 노인 공항창고근로자, 집으로 향하는 하이웨이 선상에서 차 창문을 통해 밖으로 보이는 병사의 관을 알아본 지나가는 운전자들이 모두 헤드라이트를 점등하고 앞에선 트레일러트럭이 운구차를 이끌고 운구차 뒤로는 줄줄이 뒤 따라 가며 병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려는 일반인들의 모습들, 한 병사의 장례식을 위해 파견된 그 수많은 의장대원들과 나팔수, 관을 덮었던 삼각으로 접힌 성조기를 엄마에게 건네는 모습.
이 영화는 그냥 한 장교가 관을 차에 싣고 전사자의 유해를 가족에게 전해 주기 까지의 장정을 보여주는게 전부인 어떻게 보면 무미건조한 영화다. 재미를 위해 잠깐의 전투장면, 웃기는 이야기, 요즘 영화에서 혹 빠지면 장사가 안되는 반라의 남녀 등은 전혀 볼 수 없다. 흥행은 고사하고 개봉관에 채 나가 보지도 못하고 바로 DVD로 출시되었을 듯 싶다. 지루할 수도 있는 영화인데 난 보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위의 Daniel Lim 군의 장례도 동영상을 보니 예외없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 장례다. 부모에게 죽은 아들을 앞에 놓고 예의를 갖추어 주는 게 무슨 소용이랴 만은 그래도 그 분들의 아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나라를 위해 기꺼이 젊은 목숨을 바쳤고, 모든 미국민들이 그걸 다 알고 감사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인해 오는 위로는 최소한 줄 수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이렇게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려서 고인을 추모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해 여기에 올려본다.
****아, 그리고 아래의 링크는 방금 조카가 여기에 올려달라고 댓글을 달았기에...이건...임무를 마치고 살아서 귀환하는 병사들과 그 가족들의 Happy ending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uSMlIM9zLio
8/04/2010
사랑하는 집사님, 잘 가요!
어젯 밤에 눈을 감으셨단다. 일평생을 교회 구석구석에서 섬기시며 손자욱을 안남기신 곳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셨던 여자집사님. 암으로 계속 편찮으셨고 지난 몇 달은 극심한 고통으로 힘들어 하셨다. 하지만 숨도 잘쉬지 못하고 장이 끊어지는 그 고통중에서도 진정으로 감사와 기쁨의 생활을 하시는 모습으로 인해 믿음과 신앙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다시 생각해 보게 하신 분. 그렇지 않아도 댁으로 한 번 찾아가 뵈려고 오늘 내일 벼르던 중이었는데…어찌 그리도 바쁘게 떠나셨는지요…
토요일 새벽예배 마치면 늘 집사님이 만들어 교인들께 대접해 주시던 그 따끈한 밥과 구수한 국을 이제는 맛볼 수 없게 되었군요. 집사님, 그러나 지금은 슬퍼도 저희에게는 집사님을 기쁨으로 다시 뵐 소망이 있어요. 저희들도 머지않아 따라가야만 하는 인생들이니 잠시 후 찬란한 그 곳에서 다시 뵐 때 다시 그 맛있는 국과 밥을 만들어 주실꺼죠? 다음달로 잡혀있는 따님 결혼식도 엄마가 챙겨 주는 것 같지는 않겠지만 저희 남은 사람들이 힘을 합해 잘 치를테니 걱정놓으시고요. 집사님, 사랑합니다, 잘 가세요! 그리고 이제는 고통없이 주님 품안에서 편히 쉬세요…
8/11/2009
Pallbearer
권사님이 돌아 가셨다는 연락이 오늘 오후에 온 후론 하루 종일 우울하다. 내 얼굴이 어두워 보이는지 아내도 걱정스런 눈치다. 지난 주일 교회친교시간에 어머니가 날 정색을 하고 부르시더니 권사님이 위독하시다니까 같이 좀 가 뵙지 않겠냐고 하셨을 때 따라 나서는 건데...그 날 따라 아들녀석하고 며칠 전 부터 약속한 것이 있어 그러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고 죄송하다.
교회가 한참 힘들 때, 나와 마주치기라도 하시면 언제나 내 손을 꼭 잡으시고 "우리 장로님, 그래 힘들어 어카노? 마 힘내입시더!" 하시며 어깨가 축 처진 풋내기장로를 격려해 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위로하고 격려해 주셨던 것이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맙다.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품으로 가는 것이 복되고 감사한 일 일진대, 전혀 그렇지 못함은 내가 받은 사랑이 커서 일까? 아니면 오랜 세월을 같이 한 아내를 갑자기 먼저 보내시게 된 장로님의 건강이 더 나빠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일까? 토요일 운구위원으로 꼭 참여해 가시는 길을 지켜 드려야겠다.
교회가 한참 힘들 때, 나와 마주치기라도 하시면 언제나 내 손을 꼭 잡으시고 "우리 장로님, 그래 힘들어 어카노? 마 힘내입시더!" 하시며 어깨가 축 처진 풋내기장로를 격려해 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위로하고 격려해 주셨던 것이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맙다.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품으로 가는 것이 복되고 감사한 일 일진대, 전혀 그렇지 못함은 내가 받은 사랑이 커서 일까? 아니면 오랜 세월을 같이 한 아내를 갑자기 먼저 보내시게 된 장로님의 건강이 더 나빠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일까? 토요일 운구위원으로 꼭 참여해 가시는 길을 지켜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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