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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2015

Love Letters

사무실로 쓰는 위층의 방을 정리하다가 오랜세월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 30여년 먼지가 뽀얗게 쌓인 투박한 가죽가방.

열어보니 신혼초 우리내외가 생이별을 하고 주고 받던 편지 수백통이 모두 그안에 들어있었다. 4학년 첫학기를 마친 상태에서 결혼해 혼자 미국으로 유학와 지내던 24살의 나, 그리고 결혼 후 우리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들어와 혼자 시집생활을 하며 학교를 다니던 21살의 아내가 1년여에 걸쳐 서로를 그리워하며 주고 받던 편지들을 각자가 소중히 가지고 있던 것. 

아내가 졸업후 전공을 바꿔 미국유학을 오게 되면서 상봉해 서로의 편지들을 모두 모아 이 가방에 넣어둔 것이었다. 오랜 세월 처박아두고 잊고 있었다는 건 다시 서로를 옆에 두고 볼 수 있게된 지라 그 편지들이 더 이상 소중하게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리라. 떨어져 있을 땐 행여 서로를 잊어버리지 않을까 상대가 보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애틋한 마음 뿐이었는데.

다음 주 가족들과 떠나게 되는 여행에 가지고 가서 아내와 같이 저녁노을 지는 바닷가에 나가 앉아 하나씩 꺼내 읽어봤으면 싶다. 30년만에 햇빛을 보게되는 그 녀석들이 과연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줄까...

There's been many complaints from my children about my blog postings because my children are able to read Korean letters but still not at the level of understanding what it means. So this translation is for them(as well as nieces and nephews who visit here every once in a while) so they have a chance of getting to know what my wife and I went through while we were young. Though, the following is not exact translation but should be close. Well, it's just not my nature pulling my hair out trying on a word-to-word translation!

Few days ago, while I was cleaning the room upstairs that I use for reading and writing, I found a dusty, old brown leather bag sitting on very top of the bookshelf. What's in there was quite a big surprise for me. They are the love letters my wife and I sent to each other back and forth for a year when we were young and separated.

Spending only 2 short months after we got married at the age of 24 and 21, I had to leave her for my study in the States and my wife moved in to my parent's house by herself and continued her study. We must have written to each other almost every 2-3 days, I believe, all the way through until we met again.

Upon her graduation, she came over to me as a foreign students with a different major. I still vividly remember the moment that we saw each other again. We were in each other's arms so tight for few minutes without saying a word. Oh, we rather did not want to waste even a half second trying to say things!

Then, we gathered all the letters we had kept while we had been separated, put them in this brown leather bag, and shoved it away thinking we didn't need them anymore because we had each other again to ourselves! Before we met in the States, these letters were so precious for both of us and enabled us to connect to each other's heart and kept us alive. I remember reading her letter as soon as it arrived in my mailbox, reading it again after the dinner, before going to the bed, and when I woke up, just over and over again. I even hated the national holidays so much because the postal service stopped running!

I am thinking about taking these letters to our family trip to the Outer Banks next week and reading them one by one with her sitting down on a beach under the sunset. These letters may tell us a lot of stories that we have forgotten as we open them...



5/29/2014

버켓 리스트

한 오년 전 쯤 위와 대장 내시경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검사를 마친 의사가 다 좋은데 위벽에 좀 심하게 붉은색을 띈 부위가 보여서 조직을 떼어내 검사하는 곳으로 보냈으니 일주일 후 전화해서 검사결과를 확인하라고 했다. 검사결과 암조직은 아니나 5년후 다시 검사해 보는게 좋겠다는 권고가 있었고.

그 후 5년이 흐른 지난 화요일 다시 위와 대장검사를 한 결과는 5년 전 들었던 검사결과의 판박이. 역시 붉은 부위때문에 조직검사를 했고 결과 역시 normal tissue. 때문에 음식을 너무 맵게 먹기 때문이라고 믿는 아내가 밉지않게 눈을 살짝 흘겼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삶에 대해 더 겸허해 지는 듯 싶고 우리의 사는 것과 죽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 살도록 허락하신다면 아이 셋 모두의 결혼식을 지켜주고 싶고, 그 아이들이 낳는 손자손녀들도 만나고 싶은 바램이 있는데 꼭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간구하는 중.

요즘 한 열 개 정도의 바램들을 담은 버켓리스트를 떠올리고 있고, 1번은 지난 번에 올렸더랬는데 이제 그건 2번째로 밀려 내려와야 할 바램이 생겼다. 이름하여 "Cousins' Camp".

우리 슬하의 세 아이들이 모두 시집장가를 가면 이 근처에 모여살 확률보다는 미전국에 뿔뿔이 헤어져 살게될 확률이 크고, 그렇게 되면 자연 얼굴 볼 기회도 거의 없게된다. 또 그 애들은 나름 각자 배우자와 맞벌비하는 바쁜 생활과 자녀들 키우는 일에 치여 중년이 될 때까지 제대로 느긋하게 쉴 시간도 없을거고. 그들의 2세들 역시 우리가 자라던 시절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가졌던 따뜻하고 포근한 추억도, 사촌들과의 사귐도 거의 없게 될 것이 뻔하기에 생각해 본 것.

매년 여름 손자손녀들을 모두 우리내외가 살고있는 곳으로 불러 모아 일주일을 보내게 해 주는 것인데 제 엄마아빠가 아이들을 내려놓고 어디 휴가라도 한 일주일 호젓하게 단둘이 다녀올 수 있게 배려하고, 손자손녀들은 우리 내외가 일주일 데리고 있으면서 오랬동안 못 봤던 사촌들과 함께 신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동시에 우리내외와도 사귐을 갖는 다는 컨셉인데 키워드는 역시 "추억"이 아닐까 싶고. 그 귀엽고 한편 시끄럽고 말썽꾸러기일 아이들과 참 많은 걸 하고 싶다. 우선 15인승 밴을 하나 빌려야 하겠고, 재미있는 성경이야기도 매일 가르치는 한편 수영장이나 동물원, 박물관, 극장 등을 떼거리로 방문하고, 엄마아빠에게 보낼 감사편지도 쓰게하고, 캠프파이어도 하고, 산으로 가 밤하늘의 별도 세어보게 하고...등등 하고 싶은 게 참 많다. 해가 거듭해 가면서 좀 큰 아이들은 보조교사로 할머니할아버지를 도울 수 있을 테고...

이렇게 생각을 해 보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꽤나 많은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비슷한 동기로 이런 캠프를 하는 것 같다. 부모된 마음은 다 같은 모양.

하여간 "Cousins' Camp" is #1 in my bucket list now.

#2 item in the list: Walking St. James' way which is 650 miles long journey.



6/16/2010

Politics

큰 아이가 전공을 바꾸고 싶단다. 대학에 가기 전 부터 작정했던 전공인 비즈니스를 몇 과목 들어보더니 영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럼 뭘 하고 싶은건가 하고 물어보니 Politics란다. 더 자세하게 Foreign Affairs를 집중해서 공부하고 NGO쪽으로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한단다. 벌써 3학년으로 올라가는 마당에 너무 늦은 결정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아내와 난 이미 작정한 아이를 말릴 자신도 없거니와 말려 봤자 이미 아니라고 생각하는 전공을 계속하게 할 수 도 없어 흔쾌히 그러렴 했다.

한국이건 미국이건 지역을 떠나 워낙 권모술수가 판치고 싸움일색인 정치판을 생각하면 벌써 미간이 찌푸려지게 되지만 작게 생각하면 우리네가 사는 일상 그 자체가 작은 Politics의 장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전문적으로 그걸 공부해서 자신의 일상에 적용하고 더 나아가 사회에 익을 끼치는 일을 하게 된다면... 하는 바램으로.

좀 너무 나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일상에서의 Politics의 예를 "억지로" 생각해 보자니 가깝게는 작년 이맘때 우리 잔디밭이 개X으로 꽈-악 차서 막내 좋아하는 축구공차기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갔었다. 그래서 길가에 “여기 개 화장실 아니거던요”라는 푯말을 작게 만들어서 잔디밭에 꽂아놨었다. 그랬더니 한 달 만에 감쪽같이 개X이 사라졌다. 불특정다수에 대한 의사표현인 셈인데 반응이 있었던거다.

멀리는 고등학교때의 일. 중학교때 사격장에서 산 덕분에 고등학교 입학해서는 바로 사격부로 뽑혀 들어가게 됐다. 기록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봉황기전국사격대회등 큰 시합이면 참가해서 개인기록을 경신해 갔다. 2학년 중반쯤 된 어느 날, 축구부3학년들이 날 조용히 불러냈다. 교내 반 대항 축구시합을 지켜보다 내가 뛰는 걸 눈여겨 본 모양. 좋은 말로 할 때 축구부로 옮겨오라는 협박을 했다. 아니면 죽도록 맞던가. 그래서 맞는다고 했다. 각목으로 한 50대 맞는데 얼마나 세게 치는 지 맞는 동안 뒷 허벅지 살이 부풀어 오르면서 터져 피가 나왔다. 그리고 사격부 선배들에게는 그 일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선택은 지금 생각하니 지극히 정치적인 선택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그러마고 하고 축구부로 달랑 옮겨가면 사격부 선배들에게 배신을 때리는 것이라 사격부선배들에게 죽도록 맞게 될 것이었고, 협박당하고 맞은 일을 사격부선배들에게 발설하면 학교에서 제일 험하기로 소문난 사격부와 축구부의 피튀는 싸움이 나게 될 게 뻔한 데 나역시 그 싸움가운데서 몸이 온전히 못할 것은 정한 이치였기 때문. 결국은 배신 안 하기로 한 나의 선택, 그리고 그렇게 맞고도 입을 다물고 있던 내가 “너머나" 맘에 든 축구부 선배들이 좋은 타협을 통해 날 축구부로 끌고 가게 되었다. 덕분에 학교에 피바람 부는 것은 면했고...

하여간 이런 것 생각하면 나에겐 사는 것이 모두 정치의 작은 모형 같은데… 아니면 말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