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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2010

푸른 바다의 기억 5 - My diving memoirs

물질을 하다보면 그렇게 좋은 경험만 있는 건 아니다. 특히 물질을 돈버는 일로 삼을 때는 더 그렇다. 다이버들은 어떨 땐 큰 배들이 정박하는 부두에 나가 배 밑바닥에 붙어 자라나는 홍합, 굴, 해초등을 긁어 떼어내어 주는 일, 해수욕장에서 익사한 사람들 건져다주는 일 등의 알바를 하기도 한다. 직접 당해 보지는 않았지만 물 속에서 시신을 보게 되면 며칠동안 밥을 못 먹는다고 한다. 그것도 시계가 안 좋아 바닥을 손으로 더듬어 찾아야 하는 경우는 더 그렇다고. 시계가 제로인 물속 바닥에 배를 바짝 붙이고 손으로 이리저리 더듬거리다가 죽은 사람의 얼굴이 바로 코 앞에 탁 나타나면 얼마나 기절초풍하겠는가?


<후덜덜한 경험>

놀라는 경험으로 따지면 나도 정말 후덜덜 거리는 기억이 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한적한 해변에 있는 집을 세내어 삼사일 지내던 때의 일. 그 집의 데크에서 보니 바다 멀리 뭔가가 툭 튀어나와 있는데 처음엔 펠리컨같은 큰 새가 떠 있는 줄 알았다. 근데 시간이 지나도 그게 그 자리에 있어 굉장히 궁금했다. 섬 같지도 않고… 수영으로 나가면 한 5분이상은 족히 걸릴 거리. 그런데 문제는 집에서 여기 올 때 스킨장비(마스크, 스노클, 물갈퀴)를 전혀 챙겨오지 않은거다. 그렇다고 어디가서 그걸 사게되면50불에서 100불은 써야 하니 그것도 아깝고.

해변가를 여기저기 둘러보니 머리를 고정시키는 고무끈이 없어져서 누가 버리고 간 마스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 잘됐다. 저거라도… 머리에 고정시키는 끈이 없어도 얼굴에 잘 맞기만 하면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걸 깨끗이 씻어 얼굴에 맞춰 보았다. 잘 맞았다. 그리고 숨을 훅 들이쉬니 마스크가 거짓말 처럼 얼굴에 붙는다. 여기서 키 포인트는 들여마신 숨을 내 쉬면 마스크가 그냥 떨어지기에 들여마신 숨을 딱 정지하고 계속 참고 있어야 한다는 것. ㅎ ㅎ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면 마스크를 손으로 떼려고 해도 잘 떨어지지 않고 억지로 당겨야 '뻑'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다.

혹시 몰라서 물가에서 노는 우리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해 뒀다. 아빠 조~~기 좀 들어갔다 올 테니 걱정말라고. 그리고 그 고물마스크를 수영빤스안에 껴 넣고는 수영을 하기 시작. 한 2-3분 나가니 물 색깔이 시퍼래 지면서 차가와 지기 시작하는데 완전히 얼음장 같아 머리털이 쭈뼛거림. 겁은 나지 않는데 팔에 닭살이 돋아 있는 게 보였다. 다 가서 보니 무쇠덩이다. 그래 마스크를 착용하고 바로 하강. 노스캐롤라이나는 물이 좀 누렇긴 해도 시계가 어느정도 확보되기에 3-5미터는 보인다. 참고로 미동부해변은 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 버지니아, 메릴랜드, 뉴욕, 보스턴 등으로 북상하면서 물이 점점 더 탁해지고 플로리다쪽으로 남하 할 수록 물이 점점 더 깨끗해 진다. 그리고 플로리다에서 더 내려간 바하마등 캐리비언쪽은 수정같은 물을 자랑하고.

어느 배에서 떨어뜨리고 간 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큰 ‘닻(anchor)’ 이다. 얼마나 큰 지 그 깊은 바닷속에 닿아 있는데 그 끝이 물 밖으로 나올 정도다. “야, 정말크다…”하면서 감탄을 하고 있는데 옆으로 뭔가 시커먼게 쓱 지나간다. 그냥 속으로 "여긴 물이 깊으니까 고기도 큰 모양이네?" 했다. 근데… 조금있더니 그게 다시 쓱 다가오는데 보니까... 악!!!!! 상어닷!!!! 그것도  집 채 만한. (다이버들은 좀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낚시꾼들이 고기크기를 손바닥에서 다리만한 것으로 불리는 것 처럼. ㅎ 근데 집채는 아니더라도 정말 컸다) 마스크고 뭐고 다 팽개치고 숨도 한 번 안쉬고 자유형으로 죽을 힘을 다해 그 먼거리를 헤엄쳐 나오는데 30초도 안 걸렸다는… 그 때 난 깨달았다. 사람이 급하면 “엄마야”라는 소리가 튀어나온다는… ㅡㅜ;;

7/18/2010

푸른 바다의 기억 4 - My diving memoirs

해마다 여름이면 서귀포앞바다는 잠수시합으로 시끌벅적해 지곤 했다. 각 대학과 사회의 잠수팀들이 모여 여러가지 분야에서 겨루기를 하곤 했기 때문. 아직도 그런 대회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온갖 부조리가 넘쳤던 대회 ㅎ ㅎ>

한 종목은 채취. 대회준비위원들이 전 날 잠수해 들어가 바둑알들을 바위 밑, 해초 밑 등에 감춰놓고 다음날 아침 시합이 개시되기 전 까지는 그날은 일체 잠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아침이 되어 땡하고 선수들이 들어가 채취를 하기 시작. 문제는…채취한 바둑알들을 모두 합하면 전 날 주최측이 숨겨놓은 총 바둑알 수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 @.@  그럼 도대체 전 날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해서 들어간 사람도 없고 선수들도 모두 몸에 숨기고 들어가지 못하게 검사를 했는데 어떻게 된거지? ㅋ ㅋ 비밀은 전날 밤 누가 뭘 했냐는 것에 있었다. 팀들마다 선배들이 바둑알을 사와서 수영잘하는 후배들을 하나씩 달고 Night diving 을 소리 소문없이 했다는… 전등으로 깜깜한 밤바다를 몰래 헤치면서 심어놓고 자기들만 아는 표시를 해 놓으며 다닌 거다. ㅎ ㅎ

또 한가지 인상깊었던 종목은 레이스. 섬 하나를 두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제일 빨리 돌아오는 팀이 이기는. 난 왜 한 사람은 수영선수를, 다른 한 사람은 격투기선수를 선배들이 뽑는지 이해를 못했다. 그런데…시합을 시작하고나서야 그 이유을 바로 알아채 버렸다. 수영선수는 먼저 앞으로 뛰고 난 다른 팀 선수들을 발로 차고 팔꿈치로 강타하는 악역 이었던 것. 정말 엄청 맞으며 엄청 때렸다. 그래서 옆구리, 얼굴들을 움켜잡는 순간을 이용해 파트너와 쏜살같이 튀어버리는…결국 우승은 못 했지만 입상은 했던 기억이 난다.

또 다른 종목은 헌팅. 총으로 된 작살(좀 강력해 위험하다)이 아닌 대작살을 가지고 들어가 정해진 시간안에 가장 많이 잡는사람이 우승하게 되는 종목. 사진에 왼쪽에 보이듯이 뒷 끝에 찰고무줄이 고정되어 있어 고무줄을 팔목에 걸고, 고무줄이 걸린 손을 작살 뾰족한 쪽으로 당겨 잡으면 장전이 되어 손을 놓기만 하면 당겨졌던 고무줄에 의해 작살이 앞으로 추진되는거다. 시합이 진행되던 지역이 광어가 많은 모래밭이었다. 광어란 놈은 둔해서 모래만 살짝 등에 업고 가만히 바닥에 엎으려 있는 까닭에 고무줄을 쓰지 않고도 작살을 곧게 세워 당구칠 때 맛세이(masse)하듯이 등 위에 놓고 한 쪽 손바닥으로 탁 치면 바로 꿰어진다. 꿴 다음 한 10초 부르르 떠는데 그 손맛이 일품이다. 그리고 다음 놈으로 접근해 다시 맛세이 한번. 계속 반복하다 보니 대여섯마리가 한 작살에 꿰어져 있었다. 이 종목은 너무 뛰어난 선수들이 많아 아예 포기하고 다른 선수들이 많이 잡는 것에 신경쓸 때 난 대원들 저녁때 먹을 회나 찌게거리가 되는 생선잡기(안주확보)에 주안점을 두었었다는…ㅎㅎㅎ

7/17/2010

푸른 바다의 기억 3 - My diving memoirs

오로지 내 경험에 의한 판단이니 혹 아니라 그럴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국에선 제주도가 물속의 동식물 색깔이 제일 화려하고 밝다. 그 종의 다양함도 동해안이나 남해안 보다 앞선 것 같고. 아마 위도상 아열대에 가까운 위치라서 그럴 것 이다. 미안하지만 서해는 전라도쪽으로 많이 내려간 남단이 아니면 ‘황해’란 이름대로 물이 누런, 탁한 색깔이고 시계가 짧아 이런 비교에선 늘 빠진다. 그런데 제주도 보다 더 좋았다고 기억되는 곳은 역시 바하마.

<최고의 경험: 바하마 잠수>

우리 큰 아이가 서너 살 쯤 됐을 무렵 아는 한 가정과 같이 바하마크루즈를 3박4일 인가 4박5일로 갔었다. 배가 어느 개인소유의 섬 앞에 정박을 하고 작은 보트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그 섬으로 실어 날랐고, 해변에 바베큐를 차려놓고 점심을 먹으며 모두들 백사장에서 해수욕을 하며 해가 질 때 까지 노는 시간이었다.

거의 이정도 수준의 환경
백사장 바로 앞에 위치한 창고같은데서 스킨장비(참고: http://oldman-james.blogspot.com/2010/06/blog-post_07.html) 를 빌려 주고 있었는데 그냥 무심결에 한 셋트를 빌렸다. 그리곤 그것들을 착용하고 물로 곧바로 들어감. 머리를 물에 담그고 바닥이 모래인 얕은 지역을 천천히 지나 한 5미터 정도 깊이의 지역으로 들어선 순간 ‘헉’하고 숨이 막혔다. 난생 처음보는 광경이었다. ‘충격’이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꺼다. 열대어 수족관에서나 볼 만한 형형색색,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의 물고기가 수천마리씩 떼를 지어 다니는데 사람을 전혀 두려워 하지 않고 오히려 몸을 툭툭 스치며 다닌다. 크기가 큰 물고기는 스친다기 보다 마치 날 밀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는…사람길이 보다 길어 보이는 사진으로만 보던 톱니 같은 이를 드러낸 바라쿠다도 내 옆을 쓱 지나쳐 가고… 바닥을 보니 물 위에 뜬 사람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비쳐 보일 정도로 물이 투명하고 맑았다. 이런 투명함은 20미터 30미터 깊이로 들어가도 그대로 유지되더라는…집채만 한 가오리 한 마리가 바닥에 모래를 뒤집어 쓴 채 바닥에 엎으려 있다가 내가 물갈퀴로 툭 건드렸을 때 모습을 드러내고 비상하던 모습이란…. 울긋 불긋한 산호초와 불가사리, 백과사전에서 보던 어린 아이만한 고동이 여기 저기 깔려있고…조금 더 가니 2차대전중 피격되어 수장된 가미카제전투기 한 대가 상반신을 모래위로 내어 놓고 나 같은 스킨다이버들을 맞는다. 10미터 정도 깊이의 바닥에 있는 비행기로 지체않고 잠수. 유리창 너머로 좌석이니 조정간이니 녹슬은 채 그대로 다 있다. 혹시나 해서 바닥쪽을 애써 들여다 보니 해골은 없는 것 같았다. ㅋ ㅋ ㅋ 이 좋은 광경들을 수중카메라가 없어 남겨놓지 못한 것이 지금도 못내 아쉽다.

이런 좋은 기억에 죽기전에 다시 한 번 바하마를 비롯한 캐리비안 쪽으로 가서 스쿠버를 해 봤으면 하는 게 바램이다. 물질은 짝(pair)으로 하는 것이 철칙이기에 여때 짝을 만들려고 애를 써 보긴 했는데 여의치 않았다. 잠수전문가인 처남이 한 번 같이 가 줄 수 있을까 생각 해 봤었지만 일년에 한 번 전화 한 통화 하는 것도 여의치 않은 사람이기에 실현 가능성도 없고… 아들녀석을 꼬셔봤다. 잠수레슨을 시켜줄테니 한 번 받아보지 않겠느냐고. 아빠가 뭣 좀 해보라고 하는 건 무조건 싫단다. ㅡ.ㅡ 수영장이 있던 지난 번 집에선 스킨다이빙맛을 우리아이들 모두에게 보여주긴 했는데 오픈water 잠수는 모두 무서운 모양이다. 과연 죽기전에 가능한 일 일까? 흑

푸른 바다의 기억 2 - My diving memoirs

무더운 여름이 한창이다. 요때 쯤이면 본능적으로 몸이 근질거려 오며 그 옛날 물질하던 기억이 새록 새록 떠 오르는데 더 잊기전에 어딘가에는 꼭 기록해 놓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생각나는 일  몇 가지.


<잘못하면 이건 레저가 아니라 노동이다.>

동해안은 물이 해안으로 부터 갑자기 깊어져 조금만 들어가도 금방 수심이 20-30미터에 이른다. 제주도 같진 않지만 물도 맑은 편이고. 한 번은 막 스쿠버를 시작하는 후배 하나를 데리고 들어간 적이 있었다. 골프를 레인지에서만 연습하던 사람이 처음 필드로 나갈 때 ‘머리를 올린다’는 표현을 쓰듯이 이 친구 역시 처음 스쿠버(참고: http://oldman-james.blogspot.com/2010/06/blog-post_07.html) 호흡장비를 차리고 들어가는 첫날=머리올리는 날 이었다.

녀석은 훈련때 스쿠버를 할 때는 숨을 아껴서 쉬어야 조금이라도 잠수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고 그렇게 가르쳤건만 주위의 황홀한 광경에 미쳐서 무슨 발정한 황소마냥 “푸후후, 푸후우”하면서 공기를 낭비하고 있었고 난 걱정스런 마음에 그 친구에게만 관심을 집중하느라 주위환경을 살필 겨를도 없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얼마 안 가 공기를 다 쓴 그 친구가 수면으로 올라가겠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수면으로 같이 상승해 보니 좀 이상했다. 해변은 보이지 않고 바다 한 가운데다. 해변은 까마득하게 보일락 말락하고… 아마 모르는 사이에 급조류에 떠밀려나온 모양이다. 어쩐지 물속에서 보니 곧바로 서 있어야 하는 해초들이 전부 옆으로 누워 있더라니…

이제부터는 완전 노동이다. 등에는 쇳덩이로 된 공기통, 허리에는 7-10 Kg의 납덩이를 차고 해변까지 수영으로 가는거다…잠수를 좀 아는 분은 “어? BC(목부위에 차는 구명조끼같은 것. 바람을 공기통으로 부터 연결된 호스로 넣던가 급할 때는 그냥 입으로도 불어 넣을 수 있는)를 부풀리면 그냥 둥둥떠서 나올텐데?”할 지 모르겠다. 근데 워낙 가난한 팀이라 BC가 몇 없었다. 그나마 먼저 들어간 녀석들의 몫이었고 우리 둘 은 그것도 없이 들어 가야했다. 그러니까 맨 몸으로 20-30 Kg의 장비를 달고 무식하게 수영을 해야했다는…

나중에는 힘빠진 그 녀석까지 끌고서 나오는데 죽는 줄 알았다. ㅡㅜ;

푸른 바다의 기억 1 - My diving memoirs

앞으로 대여섯 번에 걸쳐 스쿠버다이빙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 볼 생각.

http://oldman-james.blogspot.com/2009/08/honeymooning-for-25-years-and-more.html 에 언급했던 것과 같이 아내의 오빠와 나는 내가 아내를 알기 이전에 이미 친구였다. 내가 스쿠버다이빙팀을 시작하고나서 그 친구를 꼬셔서 팀으로 끌어들였고 한 1-2년 같이 활동한 후에야 아내를 알게 되었다. 한 번은 갓 대학에 입학해 우리 팀에 가입하게 된 여러 대학의 신입생들을 나와 그 처남이 훈련시킨 적이 있는데 그 때 일어난 일이다.

숨 참는 것을 연습시키는 중 이었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대략 45초 정도면 더 참질 못하고 모두 뛰쳐 나온다. 그리고 횟수가 거듭할 수록 1분 20초, 1분 40초, 2분, 2분 15초 식으로 호흡을 중단할 수 있는 시간이 며칠도 아니고 몇 분 사이에 확 늘어난다. 현재 세계공식기록이 17분 정도니까 인간의 한계를 연장할 수 있는 능력이란게 엄청난거다. 한 열 댓명의 신입생을 입수시켜 고개를 박고 숨을 참게 했는데 2분 정도까지 참고 모두들 튀어 나왔다. 그런데 딱 한 명이 아직도 숨을 참고 있는거다. 시간이 2분 30초, 3분…이 넘어갔다. 그런데도 너무나 편해 보이는 자세로 둥둥 떠 있는데 순간 아차 싶었다. 그래서 처남과 난 서로 얼굴을 한 번 마주보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고개를 들어서 보니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고 한 30초 정도 지나 정신이 돌아 오는데 말이 엉기고 흥얼대는 것이 꼭 취한 듯 했다. 말로만 듣던 질소마취인 것 같았다. 원래는 수심 30미터 이상 잠수한 상태에서 신체내에 있던 질소가 혈관으로 녹아들어가 혼미해지고 몽롱해 지는 바람에 많은 잠수인들이 두려워 하는 건데 그렇게 얕은 수심에서도 체질에 따라 증세가 오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 놀랐던 기억때문에 아직도 또렷이 기억나는 이대 정치외교과 김희선 이라는 녀석(김희선, 너 이름 여기에 오르내리는 것 억울하면 나한테 연락해라 ㅋㅋ). 워낙 독종이라 그런일이 일어 났었고 그 이후 2-3년을 형이라 부르며 가는 바다마다 우리를 따라 다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당시 숨을 참다가 숨 참는 것이 점점 쉬워지면서 나중에는 참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정신은 멀쩡한 상태로...

아 이렇게 숨참는 연습을 시키는 이유는 팀원들에게 스킨다이빙을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잠수에는 일반적으로 스킨다이빙(스노클링 이라고도 함), 스쿠버다이빙, 그리고 심해잠수가 있는데 스킨다이빙은 물안경과 스노클이라 부르는 입에 무는 짧은 호스, 물갈퀴를 하고 물에 들어가기에 숨을 참고 10여 미터 내외에서 잠수가 이루어 진다. 그래서 숨을 오래 참을 수록 물속에 오래 머물며 활동할 수 있다. 스쿠버다이빙은 공기통과 호흡기를 착용하고 한 30여 미터까지 들어가 공기가 다할 때 까지 활동 하고 심해잠수는 고압에 견딜 수 있는 특수한 장비와 배합된 특수한 공기를 사용한 전문가가 아니면 하기 힘든 잠수. 우리 같은 아마추어는 주로 스킨과 스쿠버를 하고. 그러고 그 학생의 호흡이 끊어졌어도 난 훈련이 혹독하기로 소문난 적심자사구조요원 자격증소지자였고(처남도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심폐소생술로 몇 분 안에 소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식겁했던 상황만은 틀림없었다. 아무리 빨리 끄집어 내도 심폐소생에 실패해 사망하는 예외도 항상 있기 마련이기에.

그래서 시작한 물질. 처남은 나보다 더 미쳐서 아예 그 길로 나섰다. 졸업하면서 정부의 독도 생태연구팀에 잠수요원으로 따라가고, 거기서 만난 교수가 그 친구가 너무나 맘에 든 나머지 자신의 학교 대학원에 입학시켜 같이 일하기 위해 있지도 않던 “해양생물학과”를 신설했다는 거짓말같은 이야기도 들었다. 그 길로 해양생물학 박사가 되더니 남극극지연구소의 소장을 여러번 거쳐 지금도 해양학자로 왕성하게 활동중이다. 근데 난 머지?...남 좋은 일만 하고. ㅠㅠ 하긴 처남은 남이 아니니까 좀 덜 억울해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