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지 25년, 그리고 연애기간을 더하면 한 30년을 아내와 같이 했다. 길다면 긴 세월이다. 헌데 아직 신혼같은 기분이다. 아내에게 그런 느낌이 아직도 드냐고 물어 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아직 연애하는 것 같이 얼굴을 볼 때 마다 사랑스럽다.
반정부데모가 한창이던 80년대 초 어느날 밤 남대문에서 큰 데모가 있었다. 아직도 80년초 데모를 언급할 때면 늘 쓰이는 상징적인 사진들이 있다. 그 가운데 남대문광장 바로 앞에서 시내버스가 불타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 내가 한 친구와 같이 있었다. 같은 스쿠버다이빙팀소속 친구였는데 통금시간 경찰을 피해 이골목 저골목을 누비며 새벽녘에야 그 친구 자취집에 도착했다. 방으로 들어서니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있던 고3 여동생이 돌아오는 오빠를 맞이 하면서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 라면을 끓여 내왔다. 그것이 이 긴 인연의 시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결혼할 때 난 24 그리고 아내는 21살 이였는데도 양가의 어르신중에 너무 어리다고 반대하신 분이 없으셨던 것이 우리에겐 참으로 다행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24+21살의 결혼은 파격적인 일이였다. 학교는 대리출석으로 때우면서 이틀이 멀다하고 사라져 하얀 눈 덮인 산꼭대기에 천막을 치고 며칠을 혼자 지내는가 하면 어느 이름없는 동해안 바닷가에서 잠수로 세월을 보내는, 영 사람구실 할 것 같이 보이지 않는 아들의 장래가 심히 걱정스러우셨던 탓에 서울대장학생아가씨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하니 웬 떡이냐 싶으셔서 아가씨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치뤄버리자 하는 심정으로 우리 부모님이 서두르셨던 것 같다.
그 후 신방을 차리기가 무섭게 유학을 떠나 버린 신랑. 신랑도 없이 학교다니며 시집생활을 해야 했던 몇 년. 자신도 유학생으로 도미해 새로운 전공으로 학교를 다니는 동시에 나와 함께 가게를 꾸려가야했던 몇 년. 그 후 이제까지 내내 시부모님을 모시고 생활을 해 온게 결혼해 지내온 햇수와 같은 25년이다. 참 많이 힘든 생활이었을 텐데도 지금까지 묵묵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준 사람. 아이들을 낳아 이쁘고 건강하게 잘 키워준 사람. 가게에서 무거운 것을 오랫동안 들어온 탓으로 지금은 그 후유증인 허리통증으로 늘 고통스러워 하는 그 사람. 남편을 원망하거나 기죽일 소리는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 지내왔다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정말 그래왔던 사람.
오늘 아침에 큰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길에 딸아이와 이야기했다.
"I love your mom so much and I can't help it."
"I know that, dad. She, too, always says the same thing about you to me."
"I feel like I am still honeymooning with your mom. That feeling is as fresh and real as the day 1 of our honeymoon and hasn't changed a bit."
that was very sweet. i'm so glad you guys love each other so much.. people envy that! i hope to be just as loving to my future husband. i love you both!
ReplyDeleteHmmmmmmmmm..........
ReplyDeleteI won't let my wife read this posting.^^
Pat, I am sure that you will make a beautiful wife and have been praying for your future husband from the day 1 that you came out to this world!
ReplyDelete친구야, 내가 너무 팔불출같이 집사람에 관해 떠들었나보다. 미안.
ReplyDelete(반갑습니다!) 팔불출이라뇨! 저같은 새내기 남편에게는 가슴 벅찬 이야기입니다. ^^
ReplyDelete반갑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구요. 우리 열심히 남편노릇 잘 합시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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