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들에게 내가 직접 복싱을 가르치는 것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지금까진 젊은 시절에 몇 년 했던 킥복싱의 기본동작을 가르쳐 주고 스파링도 하면서 대충 지내올 수 있었지만, 이젠 아들녀석 주먹에 힘이 불끈 실려 훈련용 미튼을 끼고도 녀석의 강한 펀치에 손이 아파 견딜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끔 내 몸을 쳐 보라고 하면서 가드를 내려 주기도 하는데 몸으로 맞는 펀치는 더 끔찍하게 아파 복부를 한 대 맞기라도 하면 숨이 턱 막히면서 무릎이 스르르 꺽일 지경.
그래 리치몬드지역에 있는 권투트레이너란 트레이너는 모조리 연락해 알아보게 되었는데... 대부분 선수생활도 안해 본 사람들이 색깔만 트레이너랍시고 대충 흉내만 내는 형국이다. 그런다가 한 사람의 훈련장엘 아들을 데리고 찾아가게 되었는데 이거 진짜다 싶은 생각이 듦.
Jerry라는 이름의 흑인 트레이너. 다운타운에 있는 빈민가에서 국민학교 체육실을 빌려 정부의 보조를 받아 가면서 대부분 엄마가 누군지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불쌍한 동네 아이들을 모아 무상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자신과 다른 트레이너들도 모두 비슷한 환경에서 온갖 사고뭉치로 자라났고 권투를 시작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삶이 바로 잡아졌다고, 그래서 이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고 설명해줬다.
벽에 붙여논 사진들을 보니 이 분을 통해 버지니아주 아마추어챔피언, 전미국 아마추어챔피언이 여럿 나왔고 연습하고 있는 학생들 중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친구들이 몇 눈에 띄였다.
아들녀석이 첫 날은 그냥 구경삼아 가는 거니까 하면서 맨발에 샌달을 질질 끌고 가길래 안되겠다 싶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양말과 운동화를 신고 가자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상견례가 끝나자마자 녀석을 바로 훈련생들 속으로 밀어 넣었다.
ㅋ ㅋ 우리 아들 그 날 얼굴이 허옇게 되도록... 굴렀다. 난 신병훈련소에서 유격훈련때 받은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가 한국에만 있던 걸로 알았는데 이 코치도 똑같은 방법으로 굴리더라는...
복싱기술 외에도 기본적인 정신상태, 훈련에 임하는 태도, 아껴서 꼭 필요한 말만 하는 방법, 어른과 상대방에 대한 예의 등을 눈물이 쏙 빠지도록 무섭고 호되게 가르친다. 한 번 들어서 못알아 듣는 녀석 뒤통수에는 빨래판 같은 그의 손바닥이 광속으로 날라오고... 이 아이들 커서 잘못되는 아이는 없을 것 같다.
향긋한 방향제를 뿜어대며 바닥이 대리석으로 반짝거리는 일반 체육관같지 않고 땀내가 넘치다 못해 쉰내가 코를 마비시키는 후줄근하고 어두운 도장(전기 아끼느라 백열등 딱 몇 개 켜놨다), 백퍼센트 까만 아이들 속에 혼자 노란둥이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날로 그만 두겠다하지 않을까 슬쩍 물었다.
"해보니 어때?"
"아빠, 나 태어나서 이렇게 쎄게 운동해 본 거 처음이야.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근데...나... 여기 매일 올꺼야" 한다.
글쎄... 그 작심이 얼마나 갈 지는 좀 두고 봐야 헐 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