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2011

일탈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난 특히나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전교에서 몇 등을 놓치면 죽을 것 처럼 공부만 하다가(극한 대비를 위해 좀 과장한 면도 없지않삼),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지면서 그저 세상을 좀 둘러보고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갑자기 생겼다. 그래서 돈이 있을리 만무한 고등학교 1학년생이 엄마지갑을 뒤져 배낭, 버너, 텐트, 등산화 등을 몰래 사 모으기 시작했고, 어느 화창한 봄 날을 택해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그것도 방학이나 공휴일이 아닌 다른 아이들 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평일에 집에는 한 마디 이야기도 없이.

없어진 나 때문에 당황하실 부모님, 학교담임선생님, 그리고 돌아와서 당할 꾸짖음 등의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내 머리속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청량리에서 기차가 출발했고, 덜커덩 덜커덩 거리는 기차의 장단을 들으면서 창가에 얼굴을 기대고 받는 봄 햇살이 너무나 따스한 가운데 난 "바로 이거야" 라는 생각을 하며 만족스런 잠으로 스르륵 빠져 들었었다.

그 첫 여행이 3일인지 아니면 4일동안 이었는지 확실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집으로 돌아온 후, 딸 넷에 아들 하나인 우리집과 학교에서의 난리는 상상에 맡기기로 하고 좌우간 그 이후 한달이 멀다하고 이런 일탈이 반복되었다. 후회도 두려움도 없었고 망설임도 없었다. 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학급등수(전교등수가 아닌)가 54/60 이라고 쓰인 성적표를 받아들고 내가 씩 웃었던 건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도저히 안되는데 아마 중학교때 받은 스트레스에다 그런 부담을 준 부모와 학교와 사회에 대한 철 모르는 어린녀석의 보복어린 감정에서 나온 것이었을 듯...

하지만 지금은 어렵고 힘든 일들이 앞을 가로 막을 때 마다 그 기억들을 되살리면 마음이 후련해지고 무슨 두려움이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며 다시 웃음을 되찾게 된다. '그래서 후회는 없었다' 라는 생각과 '우리 아이들은 그러면 안되쥐' 라는 몹시 이중잣대적인 생각을 동시에 하면서. ^^

여행을 떠나기 전 배낭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넣으며 가슴이 두근거리던 기억, 한없이 달리는 열차와 고속버스를 스치며 지나가던 푸른 숲과 눈덮인 산, 거친 능선을 열 몇 시간을 타며 내가 내쉬던 거칠고 하얀 입김, 지나치는 사람도 하나 없고 마치 귀가 먹은 것 같은 고요함속에 늠름하게 버티고 서 있던 겨울 산, 눈위에 텐트를 치고 들어가 눈을 녹여 지은 밥과 호박, 양파, 된장 고추장 넣어 끓여 먹던 찌게, 길잃어 헤메던 산에서의 밤, 대피소에서 만난 낮선 사람들과의 대화와 사귐, 그런 기억들 말이다...

14 comments:

  1. 상당히 괴짜이시었네요. 그리고, 님의 용기가 부럽기도 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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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Samuel Kim 님,
    사실 굉장히 평범한 아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일탈을 하게 되었어요. 아마 요즘 말하는 burn out이라는 상태였을 겁니다.

    뭐, 잘 따져보면 형편없는 행동이었지요. 부모님께 불순종과 불효였고, 돈을 훔치고 학교를 무단결석하는 막나가는 학생이었지요. 후회는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잘 했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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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구글 리더 괜찮네요. 관심 블로그의 업데이트 내역 등이 바로바로 뜨고 ㅎㅎ,,
    일탈이라기 보단, 전 그런 생각 들던데,,초중고, 그리고 대학교 굳이 그렇게 성실히, 쳇바퀴 돌듯이 살 필요가 있었을까? 학교, 부모가 짜맞춰준 그러한 생활들이 정말 사회에 나왔을때 도움이 되었을까?
    글쎄요, 기본적 스펙 갖추는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를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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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Wow, 굉장한 반항이었네요, 그 시절 그상황에는요. 그런데 그런 범생이들이 가끔 그렇게 엉뚱한 짓?들을 하더라구요~ 인생의 좋은 경험이 되셨네요.

    제가 그나이 때는 감히 생각도 못했겠지만, 저도 여행을 좋아하여서 지금도 혼자라면 어디 배낭여행이라도 가보고 싶다는(한비야씨처럼, 물론 그런 고생은 못하겠지만) 생각을 가끔 합니다. 하지만 이 현실이 -남편, 직장, 경제적인 여유등등- 나를 붙잡아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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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belike_him 님,
    구글리더가 편리하죠. 이젠 많이들 쓰시는 듯 합니다. 그래도 그런 고생이 있으셨으니 지금의 자리에 계신 거겠죠?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을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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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샛별 님,
    그래도 두 분이 늘 산행을 같이 다니시는 걸 뵈면서 제가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르실거예요. 저역시 제가 속한 상황에서 최고라고 생각되는 일은 아내와 시간을 내서 같이 가벼운 산행을 다니는 것 이랍니다. 막내가 대학을 가게 되면 그게 가능할라나 싶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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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조현종 님,
    사실 창피한 기억인데 적어 본 겁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인지 자꾸 과거의 일들이 회상되면서 그 기억이 새로워 지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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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여행을 하며 마음이 시원해지기가 어려운 요즘입니다. 말씀하신 그때처럼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이 좋죠... 막무가내로 가출을 감행(?)했다가 반나절만에 돌아왔던 국민학교 시절을 가진 제게는 아직은 머나먼 꿈인 듯 싶습니다. 마흔 다 되어가는 이 나이에 그렇게 했댔자 아무도 신경 안 쓸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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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SW Yoon (尹聖雄) 님,
    헉, 죽민학교때 가출을...? 반나절만에 돌아왔다면 그럼 부모님들은 어디가서 놀다 들어온 걸로 아셨겠네요. ^^

    그래도 마음만 내키면 모터사이클로 바람을 헤치며 달릴 수 있는 님이 부럽습니다. 계시는 곳에 여진의 피해가 없으시길 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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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남들은 그런것을 일탈이라고 부르겠지만 자신의 생각은 성찰의 시간이였다고 할 수 있겠죠. 멋지셨네요.
    저 역시 일상생활 중에 문득 짐을 싸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할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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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imbackpacker 님,
    그렇게 여겨주시니 고맙습니다. 쓰고 계시는 닉네임'imbackpacker'가 "일상생활 중에 문득 짐을 싸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할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에서 나온 듯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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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교토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가, 저보다는 주변 분들에게 더욱 걱정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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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SW Yoon (尹聖雄)님,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님을 포함한 세 분 정도가 일본에 계신 친구블로거들이신데...현재까지 모두 잘 계시다는 좋은 소식이었구요 원자로제어가 잘 되어 위험이 곧 사라지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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