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5/2010

행복한 전염

어릴 때 동네어귀에 약장사가 나타나 걸죽한 목소리로 “애들은 가라! 아, 날이면 날마다 있는게 아니예요! 이눔아! 넌 빨리 집에 가고 대신 엄니 아부지 오시라고 했잖여?”하고 외치며 ‘비얌’이나 웅담으로 만들었다는 정체모를(?) 약들을 내놓고 팔곤 했다. 꼭 약효시범을 보이는데 지금도 기억하는 한 시범은 단연 ‘웅담효과’.

*참고: 그 당시 약장수들과 분위기가 조금 비슷해 보이는 분을 유튭에서 찾았다 (원래는 목소리가 훨씬 저음으로 걸쭉하고 구경꾼들을 더 함부로 대함):
http://www.youtube.com/watch?v=SRUuBzdyvxg


새하얀 사기로 된 좀 깊은 접시에 물을 담고 먹물을 조금 풀어 넣어 접시의 물을 새까맣게 만든다음 웅담(지금 생각하면 숯이 아니었나 싶다. 숯이 세정작용이 뛰어나기에)이라고 하면서 코딱지만큼 조각을 잘라 접시에 떨어뜨리면 그 까만 물이 순식간에 맑아 지더라는…그러면 모인 아줌마 아저씨들이 “와!!!” 하면서 약이 다 팔려서 못사게 될 것 처럼 싸우듯이 먼저 사려고 아우성을 치곤 했다. 서방님먹이면 오줌발이 세어져서 집안에 있는 요강을 다 깨뜨려 먹어도 자긴 책임못지겠노라 능청을 떠는 그 약장사를 우린 어른들 몰래 얼마나 흉내를 내면서 놀았던가… ㅋ ㅋ ㅋ

아, 또 삼천포로 빠지려고…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늘 '웅담효과'같은 꼭 그런 현상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상급학년으로 올라가는 날 이어서 중고등부로 올라가는 바람에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아이들도 있었고, 유치부에서 올라와 처음으로 아동부예배를 같이 드리게 된 아이들도 있었다. 유치부에서 올라온 아이들 중 윤지라는 꼬마.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한 젊은 집사님내외분의 막내딸 이다.

예배시간 전 찬양을 하면서 으례 율동을 한다. 손짓, 발짓, 고갯짓, 뛰기 등을 섞어 찬양을 하는데 늘 앞에 서신 전도사님만 죽어라 땀을 흘리시면서 율동을 하곤 아이들은 멀거니 서서 구경만 하던 차. 갑자기 이 아이가 의자 사이가 율동하기에 좀 좁다고 느꼈는지 앞의 넓은 자리에 척 나가 서더니 율동을 따라하기 시작하는 거다. 그냥 동작을 설 따라 하는 정도가 아니라 곡에서 나오고 있는 beat에 맟춰 머리도 끄덕이며 정말 신나게 추는 것이었다. 안따라 하는 놈들 뒤에서 뒷통수를 톡톡쳐서 따라하게 하기위해 늘 뒤에 독려차 서있던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흔들고…다른 기존의 큰 아이들도 이 아이를 보더니 처음엔 쭈삣쭈삣 거리다가 이내 신나게 흔들기 시작. 내 기억엔 몇 년 만에 해 보는 신나는 찬양과 율동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설교말씀이 이어지는데 더 큰 아이들도 한 5분 지나니 몸을 꼬면서 딴 짓을 시작하는데 이건 설교자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응시하면서 꼼짝도 안하고 집중을 하더라는…덩달아 상급학년 아이들도 좀 쪽팔리는지 곁눈질로 이 땅콩만한 아이의 태도를 지켜보면서 이내 움직임을 자제하고…

물론 이 어린 꼬마가 어떤 의지와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행동이 전체의 분위기를 ‘확~~~~~~~~~~~~” 바꿔 버렸다. 심각한 '전염'이다.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이런 게 아닌가 싶다. 꼭 유명한 사람이거나 능력을 만천하에 인정받은 사람이어서가 아니고 평범한 한 사람이 아니 작은 아이라도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작은 동작, 소박한 의지하나로 그 주위를 바꾸고 영향을 주게 되는…

이런 신념이 나에게 있는가… 이 세상의 흐름에 역행을 한다고 혹은 걸맞지 않다고 사람들이 날 비웃을 때 난 소신있게 내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가…혼자서 그런 물결을 거슬려 올라가다 지치고 낙망한 사람을 볼 때 “힘 내세요. 당신이 결국엔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을 믿습니다!”라고 격려해 줄 수 있겠는가?

14 comments:

  1. 즐거운 전염이 아닌가요? 제목만 보면 평소에 얌전하던 아이가 난리를 죽이는 줄 알았는데, 그 반대이니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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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정말 그러네요. '무서운 젼염'에서 '행복한 전염'으로 막 바꿨습니다. ㅋ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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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 아이가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군요.. 어른들이 나서도 아이들의 공감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일은 쉽지 않은데.. 그 아이의 장점을 잘 살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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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저에게“힘 내세요. 당신이 결국엔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을 믿습니다!”요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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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촌에서 자랐음에도 저는 약장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군요. 그 프레젠테이션의 달인들을 어릴 적에 목격해봤어야 했는데...(댓글도 삼천포군요...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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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tomyou74님,
    지난 일년간 그 분위기를 고쳐보려고 아무리 애써 보아도 그게 강제로 고쳐지는게 아니더라고요. 그 아이가 다른 큰 아이들이 잘 안하는 걸 보고 "아, 이렇게 열심히 안 해도 되는거구나." 라고 생각하기 전에 잘 살려서 분위기를 그렇게 굳혀야 겠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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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kyonchih님,
    아, 원래 삼천포로 슬쩍 빠지는 게 재미있는 겁니다. ㅋ ㅋ

    아닌게 아니라 본문에 링크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유튭에서 그런 약장사들의 비디오를 뒤져 봤지만 못 찾겠더군요.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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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Kris님,
    맞아요. 저 자신을 향한 질문이기도 하고 제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을 향한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Kris님께서 분명히 주위를 변화시키실 것을 믿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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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글씨가 커지니 더욱 읽기 좋군요. 이제 저도 나이가 들어가는가요...^^ 서로 눈치보는 이곳 일본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바른 것도 아닌 것도 따라만 가는 모습들, 그 와중에 새로운 것을 찾는 모습들이 신기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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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SW Yoon(尹聖雄)님,
    ㅎ ㅎ 아직 큰 글씨 찾으시기에는 많이 젊으신 것 같은데...

    국민성이 원래 좀 그런가요? 다른 나라에서 좋은 제품이 나오면 그대로 베껴서 엄청 더 좋은 제품으로 만들어 내는...그래서 아예 오리지널로 자리를 잡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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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저도 종종 oldman님과 비슷한 고민을 하곤 합니다. 튀지 말아라, 시키는 데로만 해라는 한국의 교육 방식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스스로 남의 눈치를 살피게 되니 말이죠. 거기에 천성이 소극적이라 갖추고 있다면 그야말로 재앙이지 싶습니다.ㅎㅎ 그 아이가 커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의 신명이나 소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펼쳐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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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OVWRD님,
    시도 때도 없이 아무때나 튀는 것에는 한국에서나 이곳에서도 눈살을 찌푸리기는 마찬가지지만 소신을 가지고 일어서야 할 때 인지를 잘 판단해서 그에 맞게 행동하는 과감함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아이는 뭔가 되도 될 것 같은 기대가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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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약장수" 어릴적 동네어귀에 가끔씩 왔었지요. 그러고보니 님과 동년배가 아닌가 싶네요. 아득히 멀어져간 그 옛날 약장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약장수뿐아니라 써커스단도 있었지요. 어릴적 그때 그 시절이 몹시도 그리워지는걸 보니 이제 살만큼 살아온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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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Young님,
    약장수를 아시는 걸 뵈니 저와 비슷한 연배 맞습니다. 전 서커스는 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신나고 재미있었다고 하네요. 지금 보면 촌스럽겠지만. ㅎ ㅎ

    그래도 그렇게 블로그도 활발하게 쓰시고 하는 걸 뵈니 마음은 젊으신 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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